만리장성

by 정수TV

올해 추석을 맞이하여 송편을 사러 떡집에 갔다. 예전에는 오직 깨가 박힌 송편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콩고물이 담긴 송편을 좋아한다. 입맛도 나이에 따라 변한 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렇게 떡집 앞에 갔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얼마나 기다리는 사람이 많던지 나의 차례는 한 20명쯤 뒤였다. 그래도 즐거운 추석이니 기다리는 맛도 있었다. 특히, 평소에 보이지 않던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들 친척들을 만나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친척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데 이것 저것 음식을 준비하는 차례를 하는 것도 어느 순간 즐겁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산을 쓰고 내 차례를 기다렸고 한참 후 내 순서가 되어 여러 종류의 송편을 주문했다. 잠시 기다리니 곧 모락모락 김이 나는 송편이 나왔다. 나는 계산을 하고 내가 가져온 장 바구니에 송편을 담았다. 갑자기 고소한 송편 냄새를 맡고 싶어 장바구니에 얼굴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신혼부부로 보이는 분들이 나의 행동을 따라 하며 웃는 것이었다. 나는 민망하여 얼른 자리를 피했다. 집에 와서 아까 전의 상황을 설명했더니 집사람이 순진하게 그 자리에서 냄새를 맡는 것은 어른스럽지 않는 행동이라고 한다. "그...그런가?" 멋쩍게 웃으며 말았는데 내가 하는 행동이 가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듯싶었다. 물론 일부러 상대방을 웃기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때는 대학생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고등학생 때 같은 반 아이들이 담임선생님 모시고 한번 모이자고 해서 나에게 장소를 선정하고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 그 시절 삐삐도 없었다. 그냥 집전화로 누구를 바꿔달라고 하는 아날로그 시대이니 지금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집 전화 명단을 들고 시간이 날 때마다 대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연락을 했다. 빨간색 작은 공중전화인데 전화카드란 것을 넣으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오후에 그 공중전화에서 또 동창생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공중전화는 오픈되었고 칸막이 자체가 없었다. 하필 뒤에 여학생이 서있었다. 전화할 때 뒤에 사람이 기다리는 시절이니 말할 때도 조심스럽고 뒷사람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렇게 전화 걸어 이번 주말에 약속장소로 나올 수 있냐고 전화를 걸었다. 시간은 저녁 6시 정도였고 장소는 '만리장성'이라는 시내에 새로 생긴 고급 중국집이었다. 담임선생님 모시고 모임 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동창이 장소를 잘 못 알아들은 듯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고 했다. 나는 뒤에 사람이 있어 수화기에 귓속말로 조용히 말했다.

"만리장성"

"어디라고? 잘 안 들려 크게 얘기해 줘"

아, 어쩐다. 공중전화라서 들릴 텐데 최대한 잘 들리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얘기했다.

"만리장성"

"만? 리? 어디?" 아, 세 번을 얘기해도 못 알아듣다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남들이 듣지 않을 정도로 크게 얘기했다.

"만. 리. 장. 성!"

그 순간 내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학생이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웃다 못해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웃다 못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무슨 일이 생겼나 여성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분은 거의 실성한 듯 울며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을 만리장성에서 하나요". 나는 그 친구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자리를 피했다.

가끔 그때의 상황이 생각나는데 고등학교 동창 모임을 만리장성에서 한다는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 봐도 웃긴다. 사실 진짜 만리장성은 가본 적이 없다. 지금은 그때의 만리장성 중국집은 이미 세월 속에 사라졌고 이번 기회에 진짜 만리장성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을 정도이다. 그 당시 공부하느라 참 고생 많았는데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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