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가 행복이란 주제에 쓰일 줄을 몰랐다. 나는 사실 만성 치질환자이다. 20대 초반에 시작된 치질은 40대 후반인 지금까지 줄기차게 나를 괴롭혔다. 아마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성인들도 이것 때문에 한번쯤은 고생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나의 치질은 군 시절로 돌아간다. 군대 신병 시절 논산훈련소란 곳에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해 보니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1995년 1월, 날씨는 왜 그렇게도 추운지 훈련받고 꽁꽁 언 몸으로 내무실에 들어오면 역시나 펄럭이는 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 당시는 내무실의 문마저도 비닐하우스용 비닐로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GNP 1년 간 40조를 쓰는 국방부 예산은 모두 어디에 쓰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좋아졌겠지만 그 당시의 시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다. 씻을 수 있는 물은 또 얼마나 차갑던지 차라리 씻는 것을 포기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내무실도 얼마나 추운지 동기생들끼리 껴안고 자야 간신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는 특이한 규칙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 통제였다. 얼마 전 논산 훈련소에서 화장실을 2분 이내에 다녀오라고 해서 문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도 워낙 사건사고가 많다 보니 화장실을 못 가게 하고 가더라도 1분 이내에 볼 일을 봐야 다음 사람이 들어가는 체제였다. 나는 숫기도 없는 데다 1분 내엔 도저히 자신 없어 그냥 나와야 했다. 그렇게 보름쯤 화장실을 못 가니 당연히 탈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병이 생긴 채 자대에 배치받았는데 화장실을 갈 때면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어떻게 견디며 신병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화장실에서 못 나오는 나를 선임 한 명이 다가와 "조이병, 무슨 문제 있어?"라고 물어봤다. "..." 나는 차마 엉덩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이 좀 아픈 거 같습니다"라고 둘러댔는데 그날 선임이 나를 의무대에 데리고 가서 군의관 면담을 요청하고 갔다. 나는 '군대에도 병원이 있구나!' 감탄하며 군의관을 만났는데 "어디 아파?" 묻는 것이다.
정말 세상이 멈춘듯한 느낌이었다. "저... 엉... 덩이가..." 눈치 빠른 군의관은 뒤돌아 바지를 벗으라고 하였다.
"그건 좀..." 정말 난감하였다. "괜찮아 같은 남자인데" 끝내 군의관의 명령이라 바지를 내리고 말았는데 쓰윽 보더니 "응, 초기인데 괜찮네" 다행이었다. 나는 이 사실이 부끄러워 절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점호시간에 본부로부터 긴급 전달사항이 있다며 모두들 자리에 앉으라고 해서 나도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나의 이름이 불리더니 오늘부터 아침, 저녁 점호시간에 "무조건 정비실에 가서 뜨거운 물로 좌욕을 할 것"이라는 본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모든 부대원들이 나를 힐끗힐끗 보았고 선임들도 웃음을 참느라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분명 군의관님과 절대 다른 곳에 말하지 않기로 그렇게 약속을 했건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병이 그냥 내버려 두면 깊어질 것이 분명하기에 대대장님을 비롯한 간부회의에서 논의한 끝에 이렇게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군대는 명령이 정말 중요했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살벌한 점호시간에 나는 무조건 정비실 같은 빈 방에서 의식을 치러야 했다. 나중에는 취사반에서 나를 위해 굵은소금을 한 포대 갖다 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굵은소금을 따뜻한 물에 조금 타야 치질에 효과가 좋다는 몇몇 부대원들의 훈수에 취사반에서 한 포대나 갖다 준 것이다. 정말 그 당시는 '나에게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이 있는 거지'라며 신세 한탄을 하였다. 그런데 정말 한 달쯤 지나지 그렇게 아픈 부위도 가라앉고 볼 일을 볼 때도 아프지 않았다. 정말 굵은소금과 따뜻한 물의 아침, 저녁의 좌욕은 치질에는 최고인 듯싶다.
군 제대 후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니 치질이 재발되어 얼마나 아프던지 또 군 시절이 생각나 똑같은 방법으로 자가치료를 했다. 가끔 병원에 다녔는데 병원을 갈 때마다 이상한 기계를 넣어 얼마나 아프게 하던지 병원에서 진료받은 후 며칠은 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약만 처방받고 생활하고 있었다. 한 번은 너무 아파 수술을 할 예정이었는데 수술을 받은 후배가 역시 또 아프다고 하여 수술은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은 다행히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프지 않아도 계속 그 의식을 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런 치료법을 병원에서는 보존적 치료법이라고 불렀다. 군대 시절 그 군의관이 추천한 방법도 치질은 완치가 어려우니 보존적 치료법을 알려준 것이다. 나중에 어머니께 이 사실을 얘기하니 "너의 생명을 그 군의관이 살리신 거다"라고 하셨다. 치질이란 게 치료를 안 하면 생명도 잃을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그 당시 그 군의관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고통 속에 군생활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큰 병에 걸릴 수도 있었겠다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극한의 상황에서 귀인을 만나는 거 같다. 이 글을 그때의 군의관이 본다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몇 년 전 내가 그렇게 노력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전문직 시험이라고 장학사가 되는 시험이었는데 이상하게 같이 공부한 동기들은 붙었는데 나만 몇 해째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떨어지는 것은 괜찮은데 같이 공부한 동기가 붙었을 때의 비참함은 세상이 나를 버린 것과 흡사했다. 나는 쿨한 척, 괜찮은 척 굴었지만 사실 마음은 죽을 것 같았다. 공부했던 책들을 모두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1주일 정도 심한 좌절감에 살다 보니 갑자기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프니 역시 몸도 아팠다. 그날 밤 좌욕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세상 어떠한 실패도 이것보다 낫지 않을까?' 내 몸이 실패는 치질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는데 그 후 나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실패를 하게 되어있다.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실패는 피할 수 없다. 노력을 한다 해도 실패를 한다. 사람은 항상 성공 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때 좌절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시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나의 치질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실패를 해도 치질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아마 그 병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올해 농협에서 우수고객 사은품으로 김장용 굵은소금을 한 포대 줬다. 이 정도 양이면 향 후 100년은 족히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