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코비치가 된 초이 게오르기

by 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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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코비치(모스크바 사람)가 된 초이 게오르기 삐뜨로비치

그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옛 수도 사마르칸트의 종합대학교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고려인이다. 나는 그보다 그의 아내인 안젤라 자매를 먼저 알았다. 그녀도 고려인이었는데 내가 사마르칸트에 있는 신학교를 돌보고 있을 때 그녀는 그곳의 신학생으로 있었다. 그녀는 아주 적극적인 학생이었으며 배움에 열의가 대단했다. 전에는 산악 등반가로 활약을 했다고 했다. 그 후 신학교 책임을 맡고 계신 선교사님께서 다시 오셔서 난 그곳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곳에 집회 초청이 있어 갔더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학교를 그만두고 그녀는 길바닥에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우리 선교 훈련원이 시작되고 그곳 사마르칸트에서도 몇 명의 신학생이 이곳으로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에 그곳에서 신학교 교무처장으로 일하던 변 알렉세이 우레노비치씨가 전화를 걸어 내게 안젤라의 남편의 우리 선교훈련원 입학에 관한 문의를 해왔다. 나는 우리 선교 훈련원이 전원 합숙인 데다가 2년 동안 그가 어떻게 가족과 떨어져 살 수 있을까 염려하여 대답을 보류했다. 며칠 후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미 모스크바로 오는 사흘 길의 기차에 안젤라의 남편이 올랐다는 것이었다. 사흘 후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에게 다짐을 받았다. 두해 동안을 가족과 떨어져 훈련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앞으로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어떠한 훈련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신 그는 한 가지를 제의했다.

매달 선교 훈련원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사마르칸트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스크바에서는 그리 큰돈이 아닌데 모스크바와 사마르칸트의 화폐 사이에 환율의 차이가 있어 그들 가족의 생활비가 될 수 있었다. 난 그것을 허락했다. 선교 훈련원에서 매달 지급하는 장학금은 일종의 학생들의 용돈이었다. 헌금도 필요했고 교회를 오가는 교통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절약하여 가족에게 보내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간혹 나는 멀리 있는 그의 가족을 위해 별도의 금액을 주기도 했었다.

선교 훈련원에서 훈련받는 사람이 가족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른 신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잘 생활해 나갔다. 더러 우스갯소리를 하여 모두를 웃기기도 하고 혼자 독학한 기타 솜씨로 찬양을 드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막힌 소식을 그가 전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그의 가족-아내와 두 아이-이 그곳의 생활을 정리하고 짐을 모두 싸서 이미 이틀 전에 모스크바로 오는 기차를 타고 오고 있는 중이라 했다.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 지 대책도 없이 그저 떠나오고 보는 것 같아 몹시 마음이 불편했다. 전에가 이곳으로 온 모습이 그러했는데 이젠 그의 가족 전체의 삶을 그렇게 무작정 옮기어 오니 나는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당혹감으로 싸여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인지, 그들의 생활까지 맡아 주는 사람으로 안 것인 지, 어쨌든 일을 저지르고 나면 내가 정리를 해 줄 것으로 여겼는지 하여튼 나는 여러 가지로 기분이 언짢았다. 또한 기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일 당장 도착할 그의 가족의 생활이 문제였다. 나는 나름대로의 그들 가족에 대한 계획과 정리가 필요했다. 그를 꾸짖고 그만두기에는 벌어진 일이 너무 앞서가고 있었고 시간이 임박했다. 신학생들을 불러서 짐을 이리저리 옮기게 하여 큰 방 하나를 비웠다. 그의 아내와 올망졸망한 그의 아이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내 맘속의 나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도 얼마나 자신의 가족이 보고 싶었을 까 하는 생각으로 그간의 불편했던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우린 그렇게 함께 살았다. 하지만 선교 훈련원의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급히 그들이 살 수 있는 다른 집을 구했다. 게오르기 형제는 훈련원에 있고 그의 가족은 조금 떨어진 다른 집에서 살았다. 그것 역시 부자연스러운 일 일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조그만 장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얼마의 돈을 손에 쥐어 주었다. 안젤라는 빵을 구워 지하철역 부근에서 팔았다.


그 후 내가 한국에 잠깐 다녀온 사이에 게오르기 형제는 훈련원에서 나가고 없었다. 게오르기도 장사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선교 훈련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우리 신학생 중의 하나가 지나는 길에서 그들 부부가 담배를 물고 서 있더라고 얼마 후에 전해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를 떠나갔다.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민족 차별로 인해 살기가 수월치 않았던 사마르칸트에서 모스크바로 성공적인 이주한 것일까. 그것이 그들의 애초의 계획이었을 까. 나는 가슴이 많이 아팠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가족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과 가슴 한 쪽에 구멍이 뚫린 듯 한 감정이 섞여 생각이 복잡해진다.

많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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