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 이름만으로 족했던 빅토르

by 김다윗

10.

그저 그의 이름만으로 족했던 ‘빅토르’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부칭(父稱)이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에다 아들의 경우에는 남성 접미어를, 딸인 경우에는 여성 접미어를 붙여 자녀들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누구의 아들 누구’ 혹은 ‘누구의 딸 누구’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것은 성경의 영향인 듯하다. 실제 그들의 이름도 성경에서 따온 것들이 많다.

마리아나 삐오뜨르(베드로)는 물론이고 빠벨(바울), 지모페(디모데), 필립(빌립), 안드레이(안드레), 안나(한나), 엘리자벳타(엘리사벳)등 무수히 많다. 우리가 아는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의 전체 이름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이다. ‘미하일’은 이름이고 ‘세르게예비치’는 부칭이다(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세르게이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껏 ‘고르바초프’라는 그의 성만 불렀던 것이다. 러시아의 전 대통령이었던 옐친의 전체 이름은 ‘보리스 니꼴라예비치 옐친’이다. 마찬가지로 보리스가 그의 이름이고 니꼴라예비치(그의 아버지는 니꼴라이였다)는 부칭이며 옐친이 그의 성이다. 위대한 작곡가인 차이콥스키의 경우에는 ‘삐오뜨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그의 풀 네임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가인 차이콥스키의 이름은 삐오뜨르(베드로)이다.그는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그의 부모나 형제, 그리고 친구들에게 ‘삐에짜(삐오뜨르, 곧 베드로라는 이름의 애칭이다)’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주로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부를 때에는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른다. 그럴 경우엔 고르바초프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른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이름과 성을 부르는 편이다. 그럴 경우의 옐친은 ‘보리스 옐친’이라고 불리어진다.


교회에서 만난 사십 대 초반에 있었던 빅토르 형제의 성과 부칭을 나는 모른다. 아무도 그레게 성을 붙여서 부르거나 부칭을 이름 뒤에 붙여 불러서 예의를 갖추지도 안았다. 그저 ‘빅토르’라는 이름만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있었다. 그는 신체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언젠가 사고를 당한 듯했다. 눈에 이상이 있어 시력이 몹시 좋지 않았고 그의 다리의 장애는 그가 걷기에 불편함을 주었다. 그는 아주 조금씩 다리를 절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데 때로 그는 생각이 어린아이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그가 가진 그대로로 그렇게 대했다. 그는 나를 참 좋아해 주었다. 그러는 그가 나도 좋았다.


그는 아내와 이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그보다 심한 육체의 장애가 있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보호소에 수용되어 있다고 했다. 왜 이혼을 하게 되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의 심한 장애로 인해 결혼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그는 주로 공장에서 하역하는 일을 했는데 금요일 일을 마치면 꼭 선교훈련원으로 와서 밤늦게 까지 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전도사님들의 양육 프로그램이 있었는 데 그는 꼭 거기에 참석하였다. 특별히 강의를 듣는 것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아닌 데 그는 즐겨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는 그를 나는 막지 않았다. 그로 인해 특별히 지장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샀다. 주로 휴대용 라디오나 만년필, 손전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제인 휴대용 보온병과 태양열 전자 손목시계였다. 그는 특히 오래도록 차를 담아 두어도 잘 식지 않는 보온병을 신기해했고 선교 훈련원에 놀러 와서도 그는 자신이 보온병에 담아 온 차를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아침 그는 울상이 되어 선교훈련원에 왔었다. 전날 밤 집으로 돌아가다 거리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그들에게 보온병과 손목시계를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손목시계와 한국제인 스테인리스 보온병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뜨려도 깨어지지 않는 그 보온병을 보면서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의 신앙에 대해선 알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교회를 참으로 잘 다녔다. 잘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다녔다. 우리에겐 아르바뜨 교회 외에 모스크바에 지(支) 교회들이 있어 나는 주일마다 세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를 해야 했다. 그는 그 교회를 모두 다녔다. 그리고 시간이 중복되지 않으면 다른 교회 예배에도 참석하곤 했다. 심지어는 토요일에는 안식교 교회에 까지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에게 사랑이 생겼다. 우리 교회를 다니는 자매였는데 그보다는 한참의 연상(年上)이었던, 그녀 역시 신체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내겐 걱정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의 젊은 아들이 그 일을 반대해서 그들은 서로를 한동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 빅토르는 상심한 얼굴로 찾아와 여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와 함께 그녀의 언니 소유인 시골 농가에 가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함께 살겠다고 말했다.


그 후 나는 잠시 선교지를 비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찾아온 빅토르에게 선교 훈련원은 신학생들이 훈련하는 곳이니 당신이 출입할 곳이 아니라 는 말을 어느 누군가가 했다고 했다. 그 후로 빅토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던 그가 그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일까. 예수님을 닮고 싶다고 하며 수염을 길렀던 그였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 까.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절룩이는 걸음으로 그는 어디를 오가고 있을 까.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도 저 건물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였으며, 저 집은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곳이라고 설명하기를 즐겨했던 그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에 그렇게도 많은 애착과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가면서도 나는 거리의 사람들을 유심히 본다. 그가 혹시나 그 어디엔가 있을까 해서다. 그의 눈이 되어 함께 절룩이며 같이 걸어가실 주님과 함께 있을 거라고 나는 오늘도 믿고 싶다.

‘승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빅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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