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배 리지아 뻬뜨로브나

by 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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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넓은 가슴의 어머니가 된, 배 리지 야 삐뜨로브나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오십 대 중반을 넘고 있었다. 얼른 보아도 그녀는 높은 교양과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내가 살고 있었던 아르바뜨의 룰랴 그리고리예비치의 집에서 그녀의 남편과 함께 우린 만났다. 그녀는 모스크바 재정 대학원에서 ‘레닌의 정치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었다. 그 후 그녀는 모스크바 자동차 도로 대학에서 18년간 ‘레닌의 정치 경제’를 강의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 고려인 협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고려인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그녀였다. 그 당시 나는 교회 설립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겠다 싶어 독창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찬양 곡들과 한국민요, 그리고 이태리 가곡과 러시아 가곡을 묶어 그해 91년도 6월 30일 모스크바 시내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와 주었는데 그날 나는 교회 설립의 소식을 알렸다. 그때 그녀는 꽃다발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와서는 사람들에게 짧은 즉흥 연설을 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은 레닌을 닮아 있었다. 청중들에게 우리 조국의 젊은이가 이 먼 곳까지 와서 교회를 여는데 우리 모두 교회를 다니자고 웅변조의 짤막한 연설을 했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일주일 후 교회 창립 예배 때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날 저녁에 연락이 오기를 급한 회의가 있어 참석지 못했다고 했다. 그다음 주일에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날도 전화를 걸어 참석지 못한 사정을 알려 왔었다. 그다음 세 번째 주일이 되던 날에는 그녀가 교회에 왔었다. 그 후 그녀는 한 번도 예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교회의 중심 멤버가 되어서 활동하고 신학교에도 다녔으며 여성 고려인 협회와 우리 교회가 협력하여 한글학교도 운영했다. 또한 여성 고려인 협회는 외국으로 소련 방문을 위한 초청장도 발급할 수 있는 기관이었는데 여러 선교사님들이 초청장 발급과 비자 연장 문제로 그 협회와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흐트러짐 없는 인격과 따뜻한 태도로 대했다. 그녀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이미 두 번의 북한 방문과 한 번의 한국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여성 고려인 협회의 업무 차였다. 서울을 방문한 그녀에게 어느 기자가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나누어진 두 개의 조국을 두고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며 좋고 나쁜 점은 양쪽 다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녀의 남쪽 조국의 기자는 북한의 좋은 점이 무엇이며 어떤 점의 남한이 좋지 않느냐고 이어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기를 남한은 북한에 비해 공해가 너무 심하며 빈부의 차가 심각하고 북한은 그런 점에서 뛰어나고 북한에선 젊은이들이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없는 데 남한에선 공부를 할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고 했다. 그녀는 서울에서 보이지 않는 저쪽의 조국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았다. 북쪽의 기자가 물었다 해도 그녀는 남쪽의 좋지 않은 점에 침묵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반듯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가다 요금을 낼 때에도 그녀는 항상 자신의 지갑에서 가장 새 돈을 골라 꺼내 기사에게 주었다. 그녀는 내가 멀리 사마르칸트까지 선교 여행을 갈 때에도 항상 동행했다. 자상한 어머니로, 훌륭한 통역자로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강의나 설교를 위해 비행기로 네 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사마르칸트까지의 항공료는 매우 비쌌다. 소련이라는 나라로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각 나라가 자신들의 공화국으로 독립하고부터는 국제선 요금이 적용되었다. 항공료는 항상 소련인과 외국인과의 차등요금이 있었는데 각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에도 어느 공화국 사람이건 구소련의 붉은 여권이 있는 사람은 자국인으로 인정하여 요금이 외국인보다 많이 저렴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선교비 사정이 수월치 않을 때에는 사마르칸트로 갈 때에 나는 그녀의 아들의 여권을 가지고 다녔다. 그것이 남을 속이는 나쁜 일이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그 여권에 붙어있는 흑백사진이 나를 조금 닮은 듯했고 나이도 비슷했다. 그러나 매번 여행을 앞두고는 조마조마한 마음은 언제나 떨칠 수가 없었다. 탑승 수속은 항상 그녀가 맡아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르칸트에서 돌아오는 항공기가 결항하여 따쉬켄트로 승용차로 가서 모스크바로 오는 그곳 공항을 이용해야 했는데 따쉬켄트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하다가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우린 졸지에 죄인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막상 붙잡히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하지만 우린 서로가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고 또 부끄러웠다. 구석진 곳에 끌려가 가진 돈을 다 뺏기고 나서야 우린 풀려나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우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약속했다.


그녀를 탐내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있었다. 여러 좋은 조건들을 제시하며 그녀를 자신들의 교회로 데려가려고 애를 썼다. 그때마다 그녀는 “저는 개띠인데 개는 평생 한 주인밖에는 섬길 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남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오래도록 있었다. 그녀는 교회와 나를 위해 보수 없이 열심히 일을 했지만 도통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매주 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신학교를 다니고 신년 금식기도회도 빠지지 않았지만 평생을 연구해온 레닌과 공산주의 사상과 기독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나도 별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의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지만 그것은 그녀의 천성과 인륜에 깊이 뿌리 박힌 고상한 행동인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 훈련원 ‘월드비전 하우스’가 개원되고 학기 중 프로그램으로 함께 생활하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삼일 동안의 금식 성경 통독에 들어갔다. 그녀는 그 마지막 날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폐회 예배 후 나눔의 시간 때에 그녀가 간증했을 때 나는 많이 흐느껴 울었다. 그 일이 있고 그녀는 영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간혹 주일 예배 때에 설교도 했다. 레닌에게서 배운 선동 조의 웅변력과 그녀의 천성적인 겸손함, 그리스도로 부터 받은 은혜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그녀는 사람들을 인도해 갔다. 더 이상 그녀에게 바랄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은혜였다. 그 후 그녀는 아르바뜨 새 생명 교회의 담임 전도사가 되었다. 신학교도 다녀야 하고 여성 고려인 협회도 이끌어야 하고 그 외에 그녀에게 일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녀는 항상 해야 일이 많았다. 그러나 결코 교회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일이 줄어들었다. 내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다니던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가슴을 아파했다. 내가 잠시 한국에 나와 있었을 때 그녀와 평생을 함께 했던 그녀의 남편이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한국에서 전해 듣고 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 힘겨운 일을 그녀 혼자 감당할 일이 그렇게도 죄송하고 가슴 아팠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믿음은 더욱 자라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그녀의 완벽하고도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삶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그녀는 교회의 재정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항상 교회의 자립을 꿈꾸며 그 방안들을 모색했다. 그래서 훈련원 부지로 구입해 놓은 땅에다 신학생들과 함께 야채를 심었다. 초창기라 거기서 큰 수익은 얻지 못했지만 우린 우리가 가꾼 야채로 우리의 식탁에 올리는 기쁨을 만끽했다. 한국에서 온 사업가가 거듭거듭 부탁해 한국으로 잠시 통역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떠나면서 혼자 두고 가게 되어 죄송하다며 그녀는 그렇게도 불편해했다. 다녀온 후 그곳에서 받은 사례비 전액인 미화 700불을 그대로 교회에 다 드리기도 했었다. 사역을 끝내고 돌아가시는 어느 선교사님의 승용차를 사서 나에게 주기도 하셨다. 항상 많은 일로 바빴지만 자신의 신앙 관리를 철저히 하는 그녀였다. 금요일마다 선교훈련원에 나와 함께 철야 기도를 했다. 선교훈련원에는 1년 중 20회의 성경 읽기 프로그램이 있는 데 그녀 역시 그 일에 빠지지 않고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벽에 붙어 있는 막대그래프를 채워 나갔다. 그녀는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보통 사람으로 행동했고 평범하게 서 있었다. 나는 지금 그녀에 대해 글을 쓸수록 내 글에 대한 부족함과 글로써 표현 못할 아쉬움에서 안타까워한다. 그녀의 특별히 훌륭했던 일과 특정한 날의 기억이 중요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특별했고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인격과 생활 자체가 훌륭한 귀감이었고 그녀의 발걸음이 성도(聖徒)의 그림자였다. 그녀가 없는 나의 선교지에서의 사역을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있는 곳에 그녀가 있었고 내 사역이 있는 곳에 그녀가 항상 함께 곁에 있었다. 내가 사역지에서 그토록 어려운 일로 고뇌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녀는 항상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때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내 곁에서 떠나보냄으로 나를 시험하시거나 연단하시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런 일이 내게 있게 하지 않으셨다. 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한 귀한 만남을 허락하신 것을 보면서 나를 장차 귀하게 쓰실 그분의 뜻을 읽는다. 이러한 귀한 만남이 그저 있다 없어질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게 주어질 상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녀, 리지아 삐뜨로브나의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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