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발자취

2부 진리에 목말라 있는 당신을 위한 6일간의 묵상여행

by 김다윗

8일

거장의 발자취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들은 제 구시(오후 3시) 기도시간을 맞추어 성전으로 기도를 드리러 가고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미 교회는 성령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거센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삽시간에 교회의 멤버는 수천 명이 넘어있었다.

그들은 일 많고 바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도의 시간을 결코 빼먹지 않았다. 제자훈련을 하느라 결혼식 주례를 서느라 정신이 없어 그들의 하나님과 보내는 경건의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도하러 가다가 걸인을 만나다

그 걸인은 예루살렘 사람이 다 아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자리에 나오기 시작하여 이제 마흔이 다 된 지금까지 그 남자는 그 자리를 떠난 본적이 없었다. 불혹의 나이를 사는 그 사내는 성전 미문에 앉아 그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날마다 보는 그였지만 그날 기도 길에 그를 만났을 때에는 자신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은 그를 그냥 지나칠 수 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오르실 때마다 그 땅바닥의 남자를 보셨지만 어쩜 그 치유를 제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셨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달라고 구걸했지만 그들에겐 그를 만족시킬만한 돈이 없었다. 그 큰 공동체의 지도자이며 또 큰일을 감당하는 그들이 걸인에게 줄 돈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되고 또 은혜가 된다. 만약 그들에게 돈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 걸인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돈이 없어 그에게 돈을 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그에게 주었으니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오늘날의 교회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금과 은을 줄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들에게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며 그 이름으로 인해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금과 은이 아니라 날마다 성전을 향하는 기도하는 마음임을 주님의 교회들은 명심해야 한다.


아름다운 이름, 능력의 이름, 나사렛 예수의 이름

그들에겐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호주머니 속에 길바닥에 앉아있는 사내에게 줄 돈도 없는 베드로와 요한이 왜 그 사람 앞에 멈추어 섰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불행한 장애자에게 접근하도록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셨다.

그리고 그들은“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쳤다.


그가 일어나다. 지체장애자가 뛰다

사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사용되어 보지 못했던 그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붙어있어 더 더욱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있어도 한 번도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그 다리에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들은 그는 향하여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지만 그는 ‘일어나서 뛰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다시는 그 사내를 장애자로 성전 미문의 걸인으로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가 요구한 것은 그의 일시적이고 육적인 것이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내놓은 대답은 근본적이며 영원한 것이었다.

두 제자의 호주머니에 불쌍한 그 걸인에게 줄 한 푼의 돈도 없게 하셨던 그 이름,

그 일이 있기 두어 달 전 밤새 고기를 찾아 디베랴 바다를 뒤지던 베드로에게 빈 그물만 보이시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제야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사도로 삼으시어 사역케 하시는 그 이름의 놀라운 뜻을 우리는 성전 미문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직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성전 미문의 장애자가 치유를 받았던 그날 밤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걷게 된 그 걸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느라 너무 늦어 집을 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날 난생 처음 장애자를 치유했던 그것은 또한 난생처음 특별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옥에 갇힌 자가 된 것이다.

그 이야기를 계속 따라 가보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그 지체 장애인의 치유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놀라 성전안의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든다. 베드로 사도는 다시 한 번 많은 무리 앞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는다. ‘대언’이라고 칭해야 마땅할 설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설교는 회중을 향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자질이나 영성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설교자를 주목하지만 설교자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성전 미문의 지체장애자의 치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흥분해 있지만 그 능력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일깨우는 베드로의 설교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의 설교이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의 설교는 다분히 히브리적이다.

그들 청중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그들만의 자존심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영화롭게 한 예수를 전한다. 특히나 그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되었다고 히브리적 심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 예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으로 인해 보내심을 입은 메시아임을 강조한다. 복음의 핵심이 칼날처럼 번득이는 메시지였다. 그리하여 그 말씀은 날선 칼이 되어듣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기에 부족치 않았다. 그 메시지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믿게 되었는데 그 수가 남자의 수만 오천에 이르렀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인 것이다.

한사람 장애자의 치유로 인해 생겨났던 그들의 흥미로움이 사도의 설교에 귀 기울이게 했고 그 설교가 마침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들을 잡으매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성전 미문의 지체 장애자가 치유를 입어 떠들썩했던 예루살렘의 저녁엔 그 남자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잔칫집의 상석엔 베드로와 요한이 앉질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성령을 받아 권능을 입은 자가 해야 할 그 다음 단계는 증인으로서의 삶이다. 증인은 순교자와 같은 어원의 말이다. 증인이 서야하는 곳은 법정이며 증인은 그곳에서 그가 경험한 것들을 말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생을 어부로 살아 한 번도 감옥에 가야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성령을 받아 권능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감옥엘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엘 가고 그들로 인해 구원 받은 사람은 오천 명이 된다. 파티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1:8).”

지상에서의 마지막 그리스도의 명령은 바로 이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다시 요약해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능을 받은 자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 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놀라운 권능은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능의 폭발은 성령 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잠재적으로 그분의 권능이 임하시지만 그 능력이 표출되는 시간과 장소는 성령 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현장과 그 때이다.

그 놀라운 성령의 능력은 사용하는 자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의 몫이다.


그때와 그 현장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그 지체장애자를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요청하지도 않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은 감추고 그 걸인을 일으킨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고 그곳에 모인 오천 명의 사람들은 그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다.

그런데 그 증인이란 단어는 ‘순교자’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자가 되기까지 증언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날 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으로 간 것은 바로 그들이 증인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의 증거에 위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옥은 그들을 삼키지 못한다. 그 감옥은 그들을 도로 토해놓고 그들은 다시 증인의 사람을 이어간다.


능력이 나타나는 것, 그것은 단지 표적(sign)이다

그것은 맛보기다. 그 표적을 보고 모여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증인들의 증언이며 그 다음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지만 증인들은 그 일에 주인공이 아니며 그들은 세례요한이다.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세워질 때까지 이 땅에서는 어디까지나 조연들이며 주인공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당신이 증인의 삶을 살아간다면-복음적으로!

1. 당신은 성령을 받고 그 성령님을 존중해야 한다.

그의 영으로 기도하고 그의 영으로 찬양하고 그의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분을 의뢰하고 날마다 그분과 함께 살아야 한다.

2. 성령님과 함께 있는 당신에게는 이미 그의 권능이 주어져 있다. 당신의 삶에서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 능력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용하라.

당신이 증인의 사람을 살아갈 때에 그 능력은 폭발되어지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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