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들 부부를 향한 너무나도 한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들은 한때 신실한 초대교회의 구성원이었고 성령과 그의 성도들과 더불어 찬양하고 기도한 예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비극 속에 휘말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너무나도 큰 비통함을 느낀다.
그들은 결국 슬픈 최후를 맞이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멘토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불행을 통해 우리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놀라운 진리를 그들의 묘비에 새겨 두었다.
바나바형제의 헌신
바나바의 놀라운 헌신이 초대교회 모든 형제들을 감동케 했고 그것은 초대 공동체에 큰 도전이 되었다. 그 아름다운 헌신을 모두가 본받길 원했고 그래서 모두들 각자의 형편대로 헌금을 드려 나누기를 기뻐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 부부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땅을 팔아 교회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그런 불행이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성령을 속였으므로 죽었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잔인하다. 신실했던 부부가 그것도 하루아침에 세 시간 간격으로 죽은 이 비극의 사건을 우린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성령님도 기뻐하실 일이 아니다. 한창 초대교회가 부흥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삼키려는 그 기도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가 깊은 한숨으로 살펴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속한 교회도 그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그 비극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들의 잘못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이 당한 일이 너무 억울했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작한 헌신의 끝이 너무나도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서는 그들과 같은 잘못을 한 사람들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왜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없는 것일까.
이제 주님은 현대의 교회를 포기하신 것일까. 아니면 묵인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성령님께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어느 한 교회에서 설교자로 섬기며 사도행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 설교를 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본문의 말씀을 만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이 말씀의 대목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께 묻고 또 묻기를 오래토록 했다.
나는 이 본문 말씀의 설교를 앞둔 그 주간 내내 성령님께 엎드려 ‘왜 그들을 그렇게 죽이셨는지, 그렇다면 왜 오늘날은 그러한 심판을 받는 사람이 없는 건지’그분 앞에 매달려 묻고 또 여쭈었다. 왜 그에게는 회개할 시간초차 주시지 않고 그렇게 쓰러지게 하셨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첫 번째 교회가 거룩하길 원했다.”
내가 그분께 묻기를 마지않았을 때 그분은 내게 찾아와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어느 시골길을 운전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그분께 매달려 그 부부의 불행에 대해 무슨 말씀이든지 좋으니 대답해주시기를 조르고 있었다.
“나는 내 첫 번째 교회가 거룩하길 원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일어설 수많은 교회의 본보기가 될 나의 첫 번째 교회가 나는 거룩하길 원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너희들보다 더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나는 내 초대 교회가 죄짓기를 두려워함으로 거룩하기를 소원했다.”
나는 내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 음성으로 인해 더 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달리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나는 펑펑 울었다. 그분은 그분의 교회가 그렇게도 거룩하기를 원하셨다. 나는 그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영에 흘러넘치는 슬픔으로 인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분은 그렇게도 당신의 교회가 거룩함으로 서있기를 원하셨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를 주님은 세우신 적이 없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생겨난 교회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아니다. 주님은 첫 번째 교회중의 한 사람이 거룩함을 잃어버리려 했을 때 묵인하지 않으시고 엄중히 벌하셨다. 회개할 틈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를 교회에서 사라지게 하셨다. 거룩하지 않는 교회에는 성령이 계실수가 없고 사탄의 앞마당이 된다. 사탄은 그 거룩하지 않은 교회들을 자신 마음대로 훼방하며 이 땅에서 수치를 당케 한다. 그래서 그런 거룩하지 않은 교회를 세상은 비웃는다. 사탄이 가득한 곳이 절간만이 아닌 이 땅의 교회에도 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한 사도행전의 해당 본문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하여 세 가지를 책망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값 얼마를 감춘 것은 그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일 뿐이다. 그가 땅값 얼마를 감출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속였기 때문이고, 그가 감히 그의 하나님의 성령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가득해야 할 그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도록 자신을 방치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죄였다.
헌신의 시작과 그 끝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헌신을 기뻐하신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헌신을 약속했다면 그 헌신이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 그 헌신자는 깨어서 그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올려드린 헌신의 약속이 완료될 때까지의 시간동안을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사탄은 가만있질 않는다
아나니아가 바치기로 서약한 것은 그저 금고에 든 돈이 아니라 땅을 팔아서 만들어야 할 돈이었다. 땅이 팔려 돈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헌신을 약속한 시점부터 그 헌신의 완료시까지의 인터벌(interval) 동안 하나님의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아나니아, 그도 성령을 받았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헌신을 약속할 수 없다. 그것도 자신이 소유한 땅을 바치는 일은 그저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을 지나가는 걸인에게 던져주는 일과는 다른 것이다. 더욱이 초대교회는 헌금을 강요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아나니아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 헌신을 약속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도 처음엔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가 아버지를 속일 수 없듯이 성령을 모르는 사람이 성령을 속일 수가 없다.
그는 사탄을 묵인했다
그는 성령을 받아 그 속에 성령으로 가득해야 할 그 마음의 성전에 사탄이 들어와 그것도 그 속에서 가득하게 되도록 까지 그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장차 자기를 삼키게 될지도 모를 악마와 싸우지 않았다.
사탄은 가만히 들어와 마침내는 주인 행세를 하는 도둑이다. 아나니아는 사탄의 속삭임을 그저 듣고 있었고 소리쳐서 그를 그 속에서 내쫒지 않았다. 도둑은 소리치면 도망가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사람일지라도 사탄은 가만히 와서 그를 유혹을 한다. 하지만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검으로 사탄을 찌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도 사탄은 와서 미혹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으로 그를 물리치셨다.
하지만 우리의 불쌍한 아나니아는 그를 침범한 사탄을 묵인했고 그럼으로 그 속에 사탄이 가득해졌다. 전날 하나님의 성전이었던 그의 마음은 사탄의 정복지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는 마침내 성령을 속이고 그 결과 땅값 얼마를 감추기에 이른 것이다.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의 결론은 내게 말씀하신 성령님의 말씀대로 “온 교회와 이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성경은 거듭 기록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만 가져야 할 경외심이다. 어느 교회나 선교단체나 그 어떤 개인일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동안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분을 만홀히 여기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엔 공터가 없다
그가 성령에 붙들림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예배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사탄이 가만히 들어와 ― 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 자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방치함으로 마침내 그의 종이 되든지를 한다.
헌신은 시작에 불과하다
당신이 헌신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사탄이 지목하는 사람은 바로 헌신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헌신이 이미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마침표가 찍히기 전까지 사탄은 재를 뿌리려 불을 지르고 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헌신의 매뉴얼이 아니라 경고문이다. 헌신은 놀이공원에서의 유희도 아니고 광장에서의 응변도 아니다. 헌신은 주님의 사랑에 눈물로 보답하는 은밀한 사랑이다.
가득이란 말의 뜻
가득 찬 곳에는 다른 것들이 들어갈 수 없다. 당신의 영혼이 성령으로 가득하게 있어야 한다. 당신이 빈틈을 보일 때 사탄은 그곳을 살며시 들어와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채우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곳을 가득 차게 한다.
그것을 방지하는 일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다.
당신이 이미 충만하다
당신이 주님을 믿어 그분을 영접한 그날, 당신에겐 성령님이 오셨고 그 성령님으로 가득해졌다. 성령님은 그의 땅을 기웃거리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어디에든지 충만하게 거하신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이 충만히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려야 한다.
더 이상 충만하게 오시라고 말씀드리지 말고 충만이 오신분과 대면하여 교제하고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식당에 온 손님에게 어서 오시라는 인사는 한 번이면 족하고 그 후엔 대접을 해야 한다.
늘 영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늘 영으로 그분께 기도를 드리며 늘 호흡하듯 그분과 대화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당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신분과 충만히 교제하는 것이 성령 충만을 이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