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상이취미 Apr 16. 2023

완벽하지 않아서 더 단순한 수납

수납은 또 다른 수납을 낳는다


보이지 않는 수납만큼이나

그 언젠가를 지키지 못할 게

뻔한 약속은 없다


본래 역할 보다

생활용품 수납장이 된 우리 집 신발장에서

자잘한 물건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담아 두는 용도의 제과점 박스


내 물건들의 크기에 맞는

수납함을 찾기 어려워서

꼭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그래서 더

오래 쓰고 싶은 마음으로

누런 종이봉투를 바닥에 깔아 주었다


필요 이상 부피가 크거나

일 년에 한 번쯤 사용하는

물건이 없기 때문에

흐트러지지 않으면 될 뿐이니

작고 낮은 상자로도 부족함이 없다



뜻하지 않게

비닐장갑이 한 주먹 생겼는데

페트병을 잘라 훤히 보이게

꾹꾹 담아 놓으니 편하다



종이 캐리어에 종량제 봉투와

재활용할 지퍼백 비닐 등을 접어 두니

한눈에 보여 꺼내기도 쉽고 담기도 좋다



직장에서 자주 버려지던

배달 도시락 케이스

하나씩 닦아 모아 겹쳐 두었는데

자잘한 수납이 필요할 때 요긴했다


두 겹 겹치면

얼음 박스가 되기도 했고

상자에서 흩어지는 티백을 담고

간식도 담았다


필요할 때 쓰고

다시 겹쳐 두면

여러 개가 아닌 것 마냥


부피도 없고 공간도 편하다


이름난 인기 수납용품이라도

내 살림살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또 다른 짐이 될 뿐이란 걸


비움으로 종종 깨닫게 된다



딸아이도 나도

필기도구들을 더 비워냈다


손안에 딱 잡히고

있는 둥 마는 둥 해 보이는

연필꽂이가 사방 풍년이다


더치커피 페트병과

뽀얀 플라스틱 통을

맞춤으로 잘랐다


귀한 시간과 경제를 소모하지 않을

이런 평온한 수납이 점점 더 좋아진다


관리 능력 이상 너무 가져서

물건 자체만으로는 두고 쓰질 못해

불러오는 수납병 구색병을 떨쳐 낸다



생수병 주름을 세 마디쯤 잘라

케이스 없는 면봉을 채워 보니

꼭 알맞다


무엇을 담는 용도가 정해진

그런 이름이 붙어 나온 게 아니면

이런 건 좀

시시하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살면서 필요한 게 더 적어지면

쓸데없는 상심도 같이 줄어드는 게

당연할 것이다



손소독제 빈병은

말랑하고 부드러워 자르기도 쉬웠다


흩어져 굴러다닐 것들이

더는 없었으면 좋으련만


아직은 담아 두어야 한다


각각의 스타일을 찾아

구태여 고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미니멀하다


혼자 도드라지지도

미관을 해치지도 않는 것이

신기하다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잘 어우러진다


비워본 사람은 안다


비우다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은

물건을 담기 위한 명목으로

덩치 큰 짐들이 수없이 늘어나 있었음을


내가 살면서

새롭게 들이기도 또 비워지기도 할

소소한 생활 물건들을 위한

수납의 완성은 애초부터 필요 없었다는 걸


느끼고 또 느끼게 된다


어렵게 비워 놓고서

더는 무엇을 들이는 것이

또 다른 비움을 부를까 싶어

두려움도 생긴다


수납이 끝나 비우더라도

부담 없이 쉽게 비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고

홀가분할 것이다



이런 건 정말 모두 비워져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딸아이가 어릴 때 쓰던

양치컵이 남아있다


키 작은 것들을 보이게 담아 두니

꺼내 쓰기 좋았다


꾸민다고 꾸미고

갖춘다고 갖췄는데

정신없어 보이고 복잡하기만 했다면


수납용품들이 문제고 원인일지도 모른다


깔끔하길 원했지만

깔끔하기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깔맞춤 병은 치유되기 힘들고

또 다른 맞춤을 원하게 한다



오래전 가루 분통 속 케이스

머리핀을 담다가

언제부턴 화장솜이 담겨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얌전하다


상품화된 획일적인 수납만이

정리의 끝이고 정석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맘에 꼭 들고

내 물건에 들어맞는 크기를 고르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었다

아무리 기웃거려도 답은 없었다


우리가 소유하는 물건들은

생각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그에 따라 수납 스타일도 변화가 요구된다


하지만 나만의 수납엔

유행이 없다



겨울이니 솜 두 개가 함께 나가고

텅 빈 부엌 키 큰 장


이불 케이스나

이불을 위한 그 무엇도

필요치 않았다


더욱 커진 대용량을 자랑하며

접어 보관하는 편리성을 강조한

수납 박스들에 눈이 갔던 시절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어딘가에 집어넣어

쌓아 올려야 할 것들이

많지만 않다면


어느 집 누구에게나

수납이란 말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흔히들 바라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더 빨리 올지도...


혹 우리는 여태

고민하지 않을 걸

맞추지 않아도 좋을 걸


그렇게나 심란해했을까


남의 집

내 집


취향껏 제 마음대로

갖고 사는 물건들은 모두 다 다른데

왜 똑같은 수납을 하고 싶었던 걸까


지극히 간단하고 부담 없는

나만의 특별한 수납을

완성해 가는 법은


손이 닿는 만큼

눈에 드는 만큼

내가 즐길 수 있을 만큼만


두고 보고 쓰는 것이 아닐까


편안하길 바라서

편리한 수납을 꿈꾼다면

역으로 불편할 부분들을

먼저 짚어 봐야 한다



제일 먼저는

필요 이상 갖지 않는 것일 거다


조용하고도

티 나지 않는 수납의 기술을 익히고

나만의 개성 있는

수납 상자를 연구해 본다


물건을 써서 편할 때와

물건을 써도 피곤할 때만

가릴 수 있다면


사는 게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패브릭 미니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