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가?-
이번 글은 ‘민주주의는 중요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언제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라는 민주주의의 사전적 의미에서 본다면, 민주주의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순간은 ‘선거’ 일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21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사전선거일이다. 사전투표 첫날 투표율은 19.5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마치 12월 3일 비상계엄을 경험한 시민들이 하마터면 사라질뻔한 자신의 주권 행사를 기다렸다는 듯이 새벽부터 투표장으로 몰려든 결과가 아닐까. 심지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분들(재외국민)의 투표율도 79.5%를 기록하며 최고치를 보였다.
1987년 이전의 한국 사회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독자라면 1987년 당시 처음 내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한다는 기억 때문에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기억할 것이다. 반면, 1987년 이후 세대의 독자라면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당연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었는지를 머리를 통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한국 시민들에게 누군가 민주주의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아니요!’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한 국가, 한 사회에서 이처럼 중요한 ‘민주주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질문해보자.
“민주주의,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가?”
1795년 칸트(I. Kant)는 『영구평화론』(Perpetual Peace)을 출간한다. 6개의 예비조항, 3가지 확정조항, 2가지 추가조항과 2가지 부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생각보다 매우 짧다. 이 내용 가운데 3가지 확정조항이 약 200년이 흘러 국제정치에서 주요 이론으로 자리 잡은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의 토대가 된다. 1970년대 들어 몇몇 학자들이 “1789년부터 1941년까지, 선출된 정부를 가진 독립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없었다”라고 주장하며 민주평화론은 본격적으로 하나의 이론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특히, 1983년 마이클 도일(M. Doyle)이라는 학자에 의해 민주평화론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기반한 하나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헌법적으로 안정된 자유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다"라며, 이를 ‘자유주의적 평화’(liberal peace) 혹은 ‘평화적 연합’(pacific union)이라고 명명했다. 민주주의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피하며 외교적으로 협력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전략적 계산이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에 내재된 구조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입법 과정에 참여하고, 전쟁이라는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을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전쟁을 결정함에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이후 다양한 연구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는 비민주주의 국가보다 서로 간에 전쟁을 거의 하지 않는다”라는 경험적 합의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연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이 발생하지 않은 현상과 1990년대 공산주의 소련이 붕괴하면서 더욱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민주평화론은 불과 2-30년 사이에 강력한 국제정치 이론으로 자리 잡은 것을 넘어,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민주평화론이 ‘국제관계에서 우리가 가진 거의 유일한 경험적 법칙’에 가깝다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평화론에 다양한 비판이 제기된다. 핵심적인 비판은 이 이론이 일견 ‘평화’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 ‘전쟁’이론으로 변질될 우려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민주주의 국가와 비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내재하고 있다. 실제 이 이론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도일 또한 평화가 보편적이거나 전체 국제사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유주의 국가들 간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분리된 평화’(separate peace)라고 명명했다. 결국 민주평화론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평화적이지만, 비민주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간섭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전락할 위험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너무 딱딱한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이 지금의 국제정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21세기 국제정치 사안 가운데 가장 뜨거운 주제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다. 이는 한국 외교에도 가장 핵심적인 변수다. 도일이 주장한 민주평화론의 분리된 평화(separate peace)를 미중관계에 적용해보면, 2가지 시나리오 혹은 진단이 가능하다. 하나는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해 국제사회가 평화적으로 되거나, 세계 평화라는 명분으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권위주인 국가인 중국에 개입하며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다.
실제 국제정치학계에서도 이 이론에 근거해 미중 경쟁 시대를 분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저명한 학자인 아이켄베리(J. Ikenberry)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약화를 민주주의적 국제 질서의 ‘위기’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평화론은 단순히 외교 전략이 아니라 규범적으로 정당한 국제 질서이며 동시에 평화를 유도하는 바람직한 정치철학적 논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자유주의 국가 간의 분리된 평화를 지탱하는 민주평화론적 구조를 복원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최근 격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은 그 시작이 아닐까.
국제정치에서 대표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인 민주평화론을 통해 한 국가 내에서 매우 중요한 민주주의가 국가 간 관계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국제정치가 항상 그러하듯이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있을 뿐 답은 없다. 다만 이 이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던지는 표 하나가 한국이라는 국내 정치는 물론 한국이라는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맺는 국제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