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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지난 100일, 유럽통합에 새로운 모멘텀!

-트럼프가 쏘아 올린 작은 공-

by kuyper

우리에게 3년이 너무 길었던 것처럼, 국제 사회에 3개월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4월 29일은 그가 돌아온 지 정확히 100일이 되는 날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세계를 혼돈으로 이끌고 있는 트럼프다. 그의 지난 3개월의 행보가 과연 미국과 유럽연합의 대서양 동맹, 그리고 유럽통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자.


이 글의 핵심은 두 가지다.

1. 우리가 윤석열을 바라봤던 것처럼, 유럽 시민들은 트럼프를 위험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2. 트럼프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재등장은 위기의 유럽통합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글의 진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어디 가서 유럽에 대해 아는 척 할 수 있는 소스를 제공하자!”


물론 이 하나의 기사로 아는 척 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유럽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스가 되길 바란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누적 총 투자액이 1,229.8억 달러(2023.12월 기준)에 달하며 유럽연합(EU)은 한국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파트너다. 동시에 한국의 누적 총 투자액은 1,225억 달러(2023.12월 기준)로, 한국은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에 두 번째로 많은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_1.jpg <사진-1> 매주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을, 분데스리가에서 김민재를, 리그앙에서 이강인을 만나고 있다. (출처: 스포츠동아)

피부에 크게 와닿지 않는 이런 숫자보다 실제 유럽은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독일의 분데스리가, 스페인의 라리가, 최근에는 이강인 선수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며 리그앙까지 챙겨보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 일정에 맞춰 여행 일정을 짜기까지 한다.


축구만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물어보면 항상 상위권에 자리하는 지역이 바로 유럽이다. 특히 유럽은 지난 반 세기 이상 유럽통합(European Integration)이라는 이상한 정치적 실험을 이어가며 여행객들에게도 엄청난 혜택을 주고 있다. 즉, 프랑스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국경을 넘어갈 때 전혀 제약이 없다. 이 때문에 유럽은 여전히 여행객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지역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있고 매력적인 유럽이지만, 실상 우리는 유럽은 잘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트럼프의 기이한 행적을 빌려 최근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향후 유럽통합의 미래를 이야기해보자.


#1. 들끓는 유럽의 민심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유럽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그 시발점으로 하나를 꼽자면 난데없는 ‘그린란드 매입’ 논란이다.


사진_2.jpg <사진-2> 지난 2월 3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 명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AP/연합뉴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당선자 신분으로 1월 7일 기자회견에서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장악하기 위해 향후 경제적 압력은 물론 군사력 또한 배제하지 않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이후 약 2주 후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미국이 그린란드를 통제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덴마크가 그린란드의 안보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덴마크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이 유럽과 관세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보는 견해와 향후 북극항로 선점을 위한 전략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이어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존의 대서양 동맹을 고려하면 이는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트럼프가 관세를 가지고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추구할 것이란 것은 누구나 예상했지만, 21세기에 제국주의 시기처럼 영토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유럽의 정치인들은 물론 유럽의 시민들도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사진_3.png <사진-3> 2월 14일, JD 밴스 부통령이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출처: VOA)

영토 야욕에 그치지 않고 소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트럼프가 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14일, 트럼프가 임명한 밴스(J.D. Vance) 부통령은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Munich Security Conference)에 참석해 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했다. 그는 러시아, 중국 등과 같은 비민주주의 국가들에 의한 외부 안보 위협보다 유럽 내부의 민주주의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밴스가 지적한 유럽의 민주주의 문제는 유럽의 가장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이민 문제를 언급하는 AfD(독일을 위한 대안정당)와 같은 극우 정당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밴스의 발언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향후 미국이 유럽의 나토(NATO) 회원국들과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촉구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분석보다 더욱 중요한 지점은 트럼프의 미국이 향후 대서양 관계의 축을 유럽의 극우정당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로 보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물론 유럽 전력에서 극우 세력을 배척하기로 한 하나의 합의(consensus)를 훼손하는 행위다.


이에 20세기 유럽의 안보를 책임지며 굳건한 대서양 동맹을 보여주던 미국에 대해 유럽 시민들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유럽 시민들은 트럼프의 미국이 아닌 비록 오랫동안 위기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유럽연합을 대안으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_4.png <사진-4> 지난 3월, 트럼프의 재등장에 대한 유럽 시민들의 인식을 다룬 폴리티코 기사 사진이다. (출처: Politico)


미국의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Politico)에 따르면, 지난 3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의 8개 국가와 덴마크의 10,572명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51%의 유럽 시민들이 트럼프를 ‘유럽의 적’(enemy of the continental alliance)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동일한 조사의 구체적인 결과들은 더 심각하다.

- 63%는 유럽 시민들은 트럼프의 재등장이 세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 43%는 트럼프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인 경향(authoritarian tendencies)을 보이고 있다!

- 39%는 유럽의 민주주의를 비판한 트럼프가 독재자(dictator)처럼 행동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지표는 ‘55%의 유럽 시민들이 향후 이른 시기에 유럽 영토 내에서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크다’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러한 응답은 9개 국가 중에서 특히 동유럽 국가이면서 유럽연합 내에서 민주주의 성숙도가 비교적 낮은 루마니아와 폴란드에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약 3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직접적인 여파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트럼프의 등장 이후 나토(NATO) 중심의 대서양 동맹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것을 방증한다. 즉, 트럼프의 등장으로 대서양 동맹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유럽 시민들 사이에서 유럽 스스로 안보 방위 능력의 향상을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_5.png <사진-5> 지난 4월 8일, 트럼프의 재등장에 대한 유럽 시민들의 인식을 다룬 Atlantic Council 분석기사 사진이다. (출처: Atlantic Council)

구체적으로 지난 3월 25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실시하는 여론조사(Eurobarometer)에서 이 같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의 재등장 이후 ‘74%의 유럽 시민들은 유럽연합으로부터 실질적인 혜택을 받고 있으며, 유럽연합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라고 밝혔다. 74%라는 결과는 이 조사가 시행된 198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소위 유럽통합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와 2000년대보다 유럽통합의 위기라고 분석하는 지금 유럽 시민들의 이러한 인식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싱크탱크인 ‘Atlantic Council’은 '국기 집결 효과(rally ‘round the flag effect)'라고 분석한다. 트럼프로 인해 점점 예측 불가능해지는 국제 정치 상황에서 유럽 시민들은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 깃발 아래로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이상 유럽통합의 위기 속에서 유럽 시민들의 비판의 대상이던 유럽연합에 대한 유럽 시민들의 이러한 지지의 변화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유럽 시민들이 미국을 더 이상 유럽 안보의 중심적 존재가 아닌 세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유럽통합에 새로운 기회의 모멘텀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2. 유럽연합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트럼프


트럼프의 지난 100일은 트럼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위기의 유럽연합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다음에 친구, 가족 혹은 연인과 유럽을 여행하게 될 경우 지금의 이야기를 써먹자. 유럽통합은 적어도 지난 300여 년의 국제정치사에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다. 20세기 한국과 일본이 전면전을 벌였다고 예를 들어보자. 이 전쟁으로 약 5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면 과연 전쟁 이후 이 두 국가 사이에 평화는 존재할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시기 전쟁을 경험한 남한과 북한은 한민족이라고 말하면서도 아직도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2차 세계대전에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독일과 프랑스가 불과 종전 이후 7년 만에 1952년 서로 전쟁의 가장 중요한 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불가사의한 일이 바로 1952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이 만든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다.

사진_6.jpg <사진-6>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모네(왼쪽)와 로버트 슈만(오른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출처: EPC)

이 만화 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장 모네과 로버트 슈만이다. 이에 유럽연합은 이들을 ‘유럽통합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라고 부르며, 브뤼셀에 가면 이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이후 유럽은 부침은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통합을 심화했다. 급기야 1991년 소린이 붕괴되면서 이듬해 유럽연합을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약 20여 년 간 유로화 도입과 과거 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유럽연합에 가입하며 말 그대로 유럽통합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유럽통합을 이끈 사람들은 유럽시민들이 아닌 각국 정상들과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브뤼셀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을 두고 항상 제기되는 비판이 바로 비민주성이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장 중시하는 유럽연합이 가장 비판받는 지점이 바로 비민주성이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가.


이와 함께 2010년 이후 유럽연합은 통합은커녕 존속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유로존 위기와 2010년대 난민 위기, 급기야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까지 이어지며 유럽통합은 말 그대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위기로 인해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독일과 프랑스까지 유럽연합에 회의적인 극우 정당들이 급성장하며 유럽통합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유럽연합은 지난 70년의 성과가 무색할 만큼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의도치 않게 유럽연합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유럽연합과의 대서양 동맹을 문제시하며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이는 오히려 유럽 시민들의 불안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에 유럽의 시민들은 자신을 지켜줄 대상이 더 이상 미국이 아닌 유럽연합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연합이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유럽의 방위는 유럽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진_7.png <사진-7> 위버(Ole Wæver는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다. (출처: 헬싱키대학교)


약 20년 전, 저명한 유럽 정치학자인 위버(Ole Wæver)는 유럽통합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의 유럽연합 그리고 유럽연합의 정체성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참혹했던 자신의 과거 유럽(Europe’s own past)을 타자화(othering)하며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등장으로 곧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70년 간 이어진 유럽통합의 기조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 기점은 2025년 트럼프의 재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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