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외교 스타일-
이번 한·필리핀 정상회담을 두고 언론들마다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어떤 언론은 원전을, 어떤 언론은 AI를, 어떤 언론은 방산을. 모두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였고, 구체적인 협력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이번 한·필리핀 정상회담을 살펴보자. 2가지 포인트가 있다.
1. 같은 듯 다른 양국의 공동언론발표문!
2. 이재명정부의 정상외교, 그리고 아세안(ASEAN)!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Joint statement) 또는 공동언론발표문(Joint Press Statement)을 채택한다. 간혹 정상회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기도 한다. 이번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마르코스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문을 채택했다.
공동언론발표문이라면 문구나 내용이 동일할 것 같지만, 막상 각 국가에서 발표한 발표문을 보면 같은 듯 다르다. 이 부분을 통해 정상회담 과정에서 쉽게 합의한 내용은 무엇이고, 각국이 정상회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어디였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양국이 각기 발표한 공동언론발표문에서 같은 부분은 발표문의 구성과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의미 부여다. 양국이 발표한 발표문의 구성은 크게 1) 정상회담의 의미 부여, 2) 실질 협력 내용, 그리고 3) 국제 정세에 대한 의견 교환이다. 동일한 이 구성에서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로 올해가 양국 수교의 77주년이라는 점과 한국전쟁 당시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필리핀이 파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필리핀을 이 부분을 더욱 강조했다. 당시 파병은 필리핀이 파견한 최초의 국제 파병 부대였다며!
얼핏 보면, 이번 정상회담의 내용을 담는 그릇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 다르다. 핵심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양국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얻고자 하는 부분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이재명 대통령과 마르코스 대통령은 모두 최근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데 동의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구체적인 지역으로 중동 지역을, 마르코스 대통령은 남중국해를 언급했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 접근할 때, 한국이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임했다면, 필리핀은 군사·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이재명 대통령 발언>
“우리 양국은 급변하는 경제‧안보 환경에 함께 대응하며 공동 번영의 길을
모색해 나갈 것입니다.”
<마르코스 대통령 발언>
“양국은 해양 영역을 포함해 지정학적 환경의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했으며” (We both recognized the growing uncertainty in geopolitical developments, ··· including in the maritime domain)
동일한 부분인데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경제·안보 환경’이라고 표현했다면,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정학적 환경의 불확실성’이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이재명 대통령이 군사적인 측면과 함께 급변하는 국제정세가 미치는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했다면, 마르코스 대통령은 보다 군사적인 측면에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필리핀의 안보 환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심화될수록 필리핀의 안보환경은 난처하다.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미국과 동맹국이었던 필리핀은 중국이 부상할수록, 그리고 그에 따라 미국과 중국이 태평양을 두고 갈등이 심화될수록 안보적으로 난처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중국 또한 패권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태평양 진출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필리핀과의 마찰을 피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중국의 입장에서 왼쪽은 한국-일본-대만이 있고, 오른쪽은 오랜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만만한 지역이 필리핀과 마주하고 있는 남중국해 지역이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만들며 필리핀과 영유권 분쟁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 필리핀의 안보 불안이 커지고 있다. 2022년 취임한 마르코스 대통령은 2023년 미국에 필리핀 내 군사기지 4곳을 추가로 제공하며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을 통해 동맹국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요구하는 동시에 중국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국과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필리핀의 안보 불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생존을 위해 필리핀은 스스로 힘을 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스스로 힘을 기르는 핵심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군사력 강화다. 이 지점을 바로 한국이 파고든 것이다.
이는 양국의 공동언론발표문의 실질 협력 분야에서 잘 드러난다. 실질적인 협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회담의 주요 성과’라는 표현으로 4가지를 제시했다.
1) 한-필리핀 FTA에 기초한 경제 분야 협력
2) 인프라‧방산 등 전략적 산업 분야 협력
3) 조선, 원전, AI 등 신성장 분야 협력
4) 민간교류 협력
앞서 말했듯이 전체적으로 한국은 경제 혹은 경제·안보적인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 필리핀이 원하는 군사적 협력은 회담의 두 번째 성과였던 전략적 산업 분야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 방산기업이 필리핀군 현대화 사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함께 지원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즉, 한국은 필리핀이 원하는 군사협력을 방산 수출의 기회로 만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달리 마르코스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문에서 회담의 주요 성과가 아닌 5가지 분야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한국의 지원과 기여에 감사’(appreciation for the Republic of Korea’s invaluable assistance and contributions)를 표했다. 바로 이 5가지 분야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필리핀이 한국에 원했던 부분이다.
1) 군 현대화와 해안경비대 역량 강화
2) 조선과 반도체 산업 협력
3) 인프라 사업 투자
4) 농업, AI 등 개발 협력
5) 한국에 거주하는 필리핀 국민의 권리와 복지 보호
결국 공동언론발표문의 실질적인 협력 분야를 보면 이재명 대통령은 경제·안보 분야의 협력을 중심으로 회담의 주요 성과를 말했다면, 마르코스 대통령은 군사·안보 분야의 협력을 중심으로 한국에 요구했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어찌 보면 외교라는 것도 거래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텐데, 필리핀이 처한 안보환경에서 필리핀의 군사·안보적 협력 요구에 한국은 무기 수출이라는 경제·안보적 협력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이렇게 이번 한-필리핀 정상회담을 본다면 무언가 아쉽다. 이재명정부의 정상외교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필리핀 정상회담 이전에 싱가포르와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두 국가의 공통점은 아세안 회원국이라는 점이며, 필리핀이 올해 아세안정상회의 의장국이라면 싱가포르는 내년 의장국이다. 그럼 이재명정부의 정상외교에서 아세안은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생각으로 지난 6월 이후 외교부 자료를 하나하나 보면서 정상외교를 정리해봤다.
지난해 6월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은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총 5회 다자외교를, 이 5차례 다자외교 현장에서 진행한 양자회담은 23회, 양자간 정상회담은 14회 가졌다. 총 42회다. 아직 임기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매달 약 4회 이상의 정상외교를 가진 셈이다.
이 정상외교 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다. 하나는 착시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아세안의 중요성이다. 먼저 전자인 착시현상을 살펴보자. 그간 이재명 대통령의 정상외교를 생각하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의 페이스메이커 발언, 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극진한 대접, 그리고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백도어 발언 등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 정상외교 국가를 살펴보면 주변 강대국보다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국가들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어, 지난해 6월 첫 다자외교 현장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양자회담을 가진 국가는 브라질, 멕시코, 인도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총 14차례 진행된 양자간 정상회담 또한 절반 이상(8회)이 글로벌 사우스로 분류되는 아세안 국가들과 중남미 국가들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들이 여전히 통념에 사로잡혀 이재명정부가 가장 처음으로 가졌던 베트남과 같은 정상회담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외교에 대한 착시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현재 이재명정부의 정상외교는 단순히 주변 4강 외교에 매몰되기보다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질서 하에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은 아세안의 중요성이다. 1년도 지나지 않은 현시점에서 이재명정부는 아세안 11개 회원국 중에서 8개국 정상을 만났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이제 10개월 정도 지나고 있으니 대략 매달 아세안 회원국 정상을 만난 셈이다. 여기에 더해 취임 후 매년 순환되는 아세안정상회의 의장국가들과의 정상회담이 눈에 띈다. 2025년 의장국이던 말레이시아, 2026년 의장국인 필리핀, 2027년 의장국인 싱가포르, 그리고 심지어 2028년 의장국인 태국까지 모두 만났다.
이러한 행보는 아세안과 인도를 핵심 협력 파트너로 인정하고 이전과는 다른 외교 다변화를 추구했던 문재인정부의 ‘신남방정책’과 유사하다. 2017년 문재인정부는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포럼에서 신남방정책을 공식화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2년 4개월 만에 아세안 10개 회원국과 인도를 모두 방문하고, 캄보디아 그리고 필리핀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이번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회담의 성과에서 이야기한 필리핀과의 FTA가 바로 이때 체결된 것이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같은 아세안 국가들을 개발도상국으로 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경향은 기성 언론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2023년 아세안은 중국에 이어 한국의 제2의 교역지역으로 성장했다. 한국에 아세안이 미국보다도 큰 시장이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아세안 회원국들은 코로나 이후 세계 경제가 침체기를 보일 때도 연 평균 5%에 이르는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제 한국 경제는 아세안을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한-필리핀 정상회담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정부와 이재명정부 모두 아세안 지역을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다. 문재인정부는 ‘신남방정책’이라는 브랜딩을 통해 외교적 전환을 천명했다. 반면 이재명정부는 특별한 외교적 발표가 없다. 이 때문에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이재명정부가 아세안 지역에 관심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문재인정부의 접근 방식이 분명하게 외교적 전환을 알리는데 효과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성과가 없을 시에 전면적인 비판에 부딪히며 정책 전체가 표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정부가 조용히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자주 밝히듯이 변화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작은 변화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한국 외교와 경제에 있어 아세안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은 조용하게 아세안 회원국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