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느린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
어느 날 엄마를 을섭씨라 부르고 싶어졌다. 아마도 결혼하고 나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름을 잃어버린 삶"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였던 것 같다. 누구의 엄마로 , 안사람으로, 아줌마로 불려진다는, 그때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공감을 하게 되면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을섭씨의 넷째 딸인 나는 겉모습이 튼튼한 것과 달리 부끄럼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그래서였는지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였다. 글을 필사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는 스무 살 시절을 보냈다.
국민학교3학년 때부터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엔 탁구를 치는 시절을 보냈다. 무작위로 뽑혀서 작은아이가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너무 어려서 탁구를 왜 쳐야 하는지도 몰랐다. 해야 하니까 쳤던 것 같다.
그렇게 스무 살 시절까지 탁구를 즐겼다.
국민학교 시절, 춘천으로 탁구시합을 나가곤 했는데, 부모님이 오셔서 응원을 해주시곤 했다. 호반의 도시에 관광지였던 소양강 댐을 관광도 하시면서 말이다.
스무 살 시절,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을 당시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었다. 그땐 몰랐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나는 달리기를 엄청 싫어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달리기를 한다. 10km 달리기도 나갔다 왔으니 세상에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또 하나 뒷동산 오르는 것도 힘들어서 산은 싫어하고 바다만 좋아했던 내가 지금은 산에도 오른다.
인생은 못한다고 단정 지을 일이 아닌 것 같다. 뒤늦은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하나하나 도전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엄마 을섭씨와 가끔 드라이브를 하고 여행을 한다. 자식 여덟을 낳으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울 엄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시며 시간의 빠름을 안타까워하시곤 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은 시간여행을 하는 게 좋다.
엄마와 같이 음식을 만들고, 카페에 가서 팥빙수를 먹고, 드라이브를 하고, 불공을 드리고, 돌탑을 쌓고, 유람선을 타고, 밤새워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80년 인생을 사셨으니 풀어놓을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렇게 하루하루에 추억을 느리게 쌓는 것이다.
툭 던져놓는 이야기가 새롭다. 그런 일도 있었구나, 엄마의 이야기는 그냥 들어드리는 게 최고다. 가끔 질문을 하고, 웃어드리고, 재밌는 이야기 해달라 떼 아닌 떼를 쓰고, 시간의 빠름이 허탈해서 외롭지 않게, 도전하시는 일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라고, 넷째 딸은 생각하는 것이다.
엄마의 열정을 닮으면 좋겠다. 아직도 직접 하시는 걸 좋아하신다. 집간장을 병에 담고서 "집간장"이라는 글씨를 정성 들여 써 붙이고, 딸들에게 보내셨다. 울 엄마 "천재" 내가 가족톡에 올리고 소통을 한다. 집간장을 비롯해 들기름까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냥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것은 다 좋다.
사랑하는 울섭씨랑 가을걷이가 끝나면 여행을 하고 싶다. 봄에는 철쭉꽃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가을에는 은행잎 아래서 사진을 찍고 싶다. 춥지 않고 적당한 날씨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서 말이다.
엄마와 딸은 가끔은 말을 하지 않아도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딸들은 말을 안 해! 할 얘기가 그렇게 없니?' 엄마 을섭씨는 가끔 툭 던지신다.
나의 시간 중에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모르시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