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의 힘이 주(周) 왕실의 힘을 능가하니 주나라 왕의 권위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죠. 140여 제후들은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다양한 전술이 고안되고 다양한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이지요.
수많은 사상가 중에 묵가(墨家)라는 학파를 창시한 묵자(墨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40여 개의 나라가 7개가 되고, 7개의 나라가 하나만 남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공격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며 다녔습니다. 치열한 전투 속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꽃은 당시에는 피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향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묵자의 전쟁관을 약처방에 비유한 학자도 있습니다. 140여 국가 중에서 7개 국가가 전쟁에서 넓은 영토을 확보하고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백 수십 개 국가의 국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약을 처방했는데 백수십 명은 병이 심해지거나 죽고 7명만 나은 꼴이라는 거죠. 이 약이 좋은 약이겠습니까? 부국강병을 통해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을 할 때, 싸우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훨씬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묵자의 생각은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이죠. 묵자의 생각이 그 당시에 수용되었다면 많은 나라들이 오순도순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선문은 전쟁터에서 승리해 돌아오는 황제나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신영복 선생(1941년~2016년)은 『더불어 숲』이라는 책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곳곳의 개선문은 어디엔가 만들어놓은 초토(焦土)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곳은 불타버린 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개선문의 크기가 전쟁터의 크기와 비례했을 터이고 개선 장군을 환영하는 인파의 숫자는 패배한 국가의 전사자 숫자일 터이지요. 신영복 선생은 이어서 “역대의 수많은 장군들이 승전보를 들고 말을 달려 들어오던 신성한 길, 전승(戰勝)에 은총을 내리던 신전, 어느 것 하나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 적이 있었죠. 그 길은 승전보를 전하는 길이었습니다. 승전보가 있으면 패전보가 있게 마련입니다. 패전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그 길이 신성한 길이 될 수는 없겠지요. 패전국 백성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신전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의 승리에 은총을 내리기 위해 신전이 지어진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신영복 선생은 일갈합니다.
강자를 중심에 두지 말고 약자를 중심에 두고 읽어야 하는 시가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1962년~ )의 ‘소스라치다’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함민복, ‘소스라치다’
군대 있을 때입니다. 어느 여름날 해가 서산을 넘어갈 무렵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장교 숙소에서 나왔습니다. 장교 숙소라 해야 병사들의 막사로부터 100여 미터 떨어진 위쪽에 벽돌로 조그맣게 지은 허름한 단층집이었습니다. 화장실은 숙소의 좁은 마당을 지나 10 미터 정도의 오솔길을 지나야 있습니다. 길 양 옆에 나있는 풀이 길을 덮어버릴 지경이었죠. 익숙한 길이라 슬리퍼 차림으로 가고 있는데 풀 사이로 뱀이 어깨까지 세우고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향하던 제 몸의 무게 중심은 뒷발에서 앞발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앞발이 착지할 위치에 뱀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섬과 동시에 착지하던 앞발을 멀리 뻗어 그대로 내달려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함민복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뱀이 훨씬 더 놀랐을 거라는 겁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뱀을 보니까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뱀이 주체가 되어 사람을 보면 오히려 뱀이 더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겁니다. 무엇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소스라치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죠. 뱀은 독이라는 무기가 있어서 상대를 놀라게 할 수 있지만, 개구리나 참새나 이름 모를 꽃들, 나무들, 돌멩이들이 사람을 볼 때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을 관계에서 ‘갑’의 기침소리에도 ‘을’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습니다. ‘을’의 놀람을 생각하는 시인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개선문 앞에서 관광객은 찬탄을 내지릅니다. 그러나 개선문이 건립되기까지 소스라치게 놀랐을 수많은 피정복민들의 아픔을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관광객의 찬탄은 제국주의에 대한 승인과 동경을 재생산하는 장치가 된다.”는 신영복 선생의 예지가 저의 가슴을 파고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