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에서 벳부까지
우리 오남매가 해외여행을 한번 다녀오자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나왔었다. 코로나 등으로 미루다가 더 늦어지기 전에 가까운 곳에라도 다녀오자며 일본 규슈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해외여행의 경험이 많은 막내 자형을 포함하여 여섯 명이 가는 것으로 하고, 총무인 막내 누나가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대로 여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026년 3월 16일(월) 08:30 인천공항에서 일본 사가공항으로 가는 티웨이 항공편을 이용하기 위해 05:30까지 인천공항에 도착하라고 한다. 우리 오남매 중, 나는 부산에, 막냇동생과 둘째 누나는 서울에, 큰누나와 막내 누나는 경북 예천에 살고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막냇동생이 자기 집에 와서 자고 새벽에 출발하면 된다고 제안하여 다들 그렇게 하기로 했다.
부산에 살고 있는 나는, 부산에서 밤 12:30에 출발하여 05:30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케이 버스가 있어 그 버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미리 버스표를 예매해 두었다. 버스가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시간에 맞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동생 집에서 누룽지로 아침을 먹고 왔다는 우리 오남매와 제시간에 만나 기쁨을 나누었다.
한 시간 남짓 비행 후에 일본 사가공항에 도착했다. 아주 작은 시골 공항이었다. 입국 수속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답답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속도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2박3일 동안 함께 여행하게 될 가이드와 일행을 공항 한쪽에서 만났다. 일행은 모두 19명이었다. 막내 자형 포함한 우리 오남매 6명, 친구로 구성된 50대 여성 4명, 부모와 자녀 둘이 포함된 일가족 4명, 부부 2명, 또 다른 부부 2명, 60대 여성 1명 등 총 19명이 한 대의 대형 버스를 이용해 여행을 시작하였다.
사가 공항을 벗어나자 넓게 펼쳐진 들판에 보리가 파릇한 생명력을 뽐내면서 온 들판을 푸른 물결로 수놓고 있었다.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거의 지평선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넓은 들판에 푸른 보리가 봄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사가 지역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보리 생산지라고 한다.
보리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달려 먼저 유후인(由布院)으로 이동했다. 2시간 정도 걸렸다. 유후인이 온천 관광지로 번성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온천 도시들은 대형 호텔과 유흥업소를 유치하며 단체 관광객 중심의 화려한 개발에 집중할 때, 유후인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온천 마을로 개발했다고 한다. 그 중심에 긴린 호수(金鱗湖)가 있다. 유후인은 긴린 호수라는 자연을 전면에 내세워 관광지로 개발한 듯하다. 긴린 호수는 호수 바닥에서 온천수과 냉수가 동시에 솟아 나와 아침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라 물안개는 없었다. 그냥 펑범한 호수처럼 보였는데, 주변의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와 먹거리 상점과 입소문이 어우러져 명품 호수의 이미지로 재탄생된 느낌이 들었다.
유후인에는 먹거리 거리가 유명하다. 축소 지향 일본인답게 앙증맞은 가게에는 다양한 먹거리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전국 고로케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금상 고로케’가 유후인의 명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오남매도 하나씩 먹어보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것이 먹기에도 좋고 맛도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이동하여 벳부(別府)에 도착하였다. 먼저 천연 입욕제로 유명한 ‘유노하나(湯の花)’ 재배지에 들렀다. 삼각형 텐트 모양의 초가집 안에 유노하나가 재배된다고 한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온천 증기가 초가집 바닥의 흙과 반응하여 결정체가 만들어진다. 이 결정체를 욕조에 조금 넣은 후 몸을 담그면 무좀이나 각종 피부 질환, 근육통 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차를 타고 잠시 이동하여 ‘가마도 지옥(かまど地獄)’을 둘러보고 약간의 체험도 했다. ‘가마도’는 일본어로 부엌의 아궁이를 뜻한다. 예전부터 이 지역의 수호신인 가마도 제사 때, 온천 증기로 밥을 지어 바쳤던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온천에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의 자연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물은 뜨겁고 매캐한 유황 연기가 뿜어져 나와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지옥과 같은 땅이라 해서 지옥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옥과도 같았던 자연환경이 이제는 관광 명소가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마도 지옥’ 내부에는 다양한 특징을 지닌 온천이 있었는데, 하늘빛을 띤 저수지 형태의 온천 한쪽에서 수증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료로 운영되는 족욕탕은 발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지만, 족욕 후에 온천 증기로 찐 달걀의 쫄깃한 맛은 발의 따뜻함과 어우러져 피로감을 싹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인 호텔 ‘머큐어 벳부만 리조트 & 스파(Mercure Beppu Bay Resort & Spa)’에 들어왔다. 벳부만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아름다운 호텔이다. 저녁 뷔페의 퀄리티가 매우 높았다. 종류도 다양했으며 입맛에도 맞아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많이 먹었다. 만족도가 높았다. 식사 후에는 대욕장과 대욕장에서 연결된 노천탕에서 온천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저녁 9시부터 별도로 마련된 라운지에서 각종 주류와 간단한 안주를 무료로 제공하여 호텔 투숙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었다.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여행의 묘미는 호텔 조식 뷔페라는 생각이 든다. 식단에 대한 고민도, 상차림에 대한 노동도 없이 다양하게 차려진 음식 중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몇 번이고 골라 먹는 재미가 아침을 상쾌하게 열어젖힌다. 그렇게 상쾌한 아침을 먹고 여행 둘째 날을 상쾌하게 출발했다.
2시간 정도 이동해 후쿠오카 근교의 다자이후(太宰府)에 도착했다. 학문의 성지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 天満宮)’를 찾았다. 이곳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천재 학자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신사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유해를 운반하던 소가 갑자기 멈춰서서 움직이지 않아서 그곳을 묘소로 정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신사 입구에 소 동상이 있었는데, 소 동상의 머리를 만지고 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머리를 만져서 소머리가 반질거렸다.
다자이후 텐만구로부터 수백 미터에 걸쳐 ‘나카미세 거리’가 이어졌다. 나카미세 거리는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 입구에 위치한 유서 깊은 상점가를 말한다. 이곳 거리에 수많은 떡집이 있었는데 매화 문향이 찍힌 매화 떡이 유명하다고 하여 먹어보았다. 막 구워내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여 씹는 맛이 있었다.
나카미세 거리 중간쯤에 스타벅스 매장이 있었는데, 수천 개의 각목을 지그재그로 짜맞춘 목조 건축물로 일본의 스타벅스 매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고 한다. 아마 일본 전통 목조 짜임 방식을 사용한 건축물이라서, 전통을 중시한 일본인들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이동해 이토시마(糸島)에 도착했다. 이곳은 바다가 아름다운 규슈의 대표적인 해변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해안선에서 가까운 바다 위에 나란히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가 이곳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이다. 두 개의 바위는 커다란 금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모습이 마치 부부가 다정하게 서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부부 바위’라 불리며, 부부의 화합을 상징하는 영험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부부 바위가 바라보이는 해안가에 ‘이토시마 카이센동(糸島 海鮮堂)’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곳은 푸른 바다와 부부 바위를 보면서 신선한 해산물 덮밥을 즐길 수 있는 소문난 맛집인데, 맛과 인연을 위해 긴 줄의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표정에는 기다림의 즐거움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잠시 이동하여 이토시마 해안가에 위치한 ‘마타이치노시오 제염소 공방(またいちの塩 工房)’을 찾았다. 이곳은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만드는 곳이다. 대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큰 구조물에 바닷물을 흘려보내 햇볕과 바람으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소금을 만든다고 한다. 전통과 단절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고집이 평범한 제염소를 관광 명소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소금 푸딩이 맛있다고 하여 먹어 보았다. 단맛과 짠맛이 미묘하게 조화되어 입맛을 사로잡는 느낌이었다.
제염소 공방 외곽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주차장 출입구에 차단기도 없었고 운전자와 반대편인 조수석 쪽에 주차료를 받는 요원이 있었는데,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주차 요금을 지불하고 다시 승차하여 주차하는 방식이었다. 주차료 징수 요원은 앉아서 주차료를 받고 운전자는 내려서 주차료를 지불하는 특이한 방식이었다. 자동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도 전통의 한 방식인 듯싶었다. 주차장에 들어오는 승객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남녀가 함께 승차했을 경우 여성이 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거의 소형 자동차이다. 날렵한 모습이라기보다 천장이 높은 박스형 경차가 대부분이었다. 일본의 좁은 도로 환경이나 주차의 편의성, 실용성을 중시하는 국민성이 어우러져 경차가 존중받는 나라가 된 듯싶었다.
한 시간 정도 이동하여 둘째 날의 마지막 관광지인 ‘가쓰라성(唐津城)’에 도착했다. 바다에 돌출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성 자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형태를 지녔다. 성(城)은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방어 기능이 핵심이지만 성의 기능과 방어의 방법에 따라 한국의 성과 일본의 성에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성(城)은 백성과 수령이 함께 살며 외부의 침입에 대해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마을 전체를 감싸는 읍성이나 산 전체를 두르는 산성이 발달했다. 반면 일본의 성은 주로 영주의 권위를 상징하고 영주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백성은 성 밖에 살고 성은 백성들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로 만들어 영주는 가장 깊숙한 곳에 머무르며 영주를 보호하기에 최적의 구조로 성이 발달했다.
일본의 성은 인공적인 방어막인 해자를 매우 깊고 넓게 파서 물을 채운다. 이곳 ‘가라쓰 성’은 바다를 해자로 활용해 바다가 천연의 방어막으로 작용하며, 혹시 적이 성까지 접근하더라도 성 자체의 돌담을 오르지 못하게 돌담을 높게 쌓았다. 영주가 교체되면 백성들은 전임 영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주에게 순응하여 생존을 이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본 농민들은 ‘땅은 남지만 주인은 바뀔 수 있다’는 원칙으로 대를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날의 일정을 마치고 ‘머큐어 사가 가라쓰 리조트(Mercure Saga Karatsu Resort)’에 들어왔다. 숙소는 가라쓰만의 아름다운 바다와 소나무 숲이 잘 어우러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욕장에서 여행의 피로를 풀고 뷔페로 만찬을 즐겼다. 다양한 해산물과 신선한 농산물로 차려진 뷔페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입맛에 맞았다. 우리 오남매는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다양한 음식을 교체해 가며 여러 번 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여행의 묘미는 눈보다 맛이라더니 꼭 맞는 말인 듯했다.
셋째 날은 아침부터 약하게 비가 내렸다. 호텔 조식 후 사가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느리게 진행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열두 시 반이 넘었다. 경북 예천으로 가야 될 자형의 차가 동생네 집에 주차되어 있어 동생네 집 근처에 가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자고 했다. 뜨끈한 염소탕으로 점심을 먹고, 진하게 이별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
짧은 일정이 다소 아쉬웠지만, 무사히 우리 오남매가 함께 해외여행이라는 버킷리스트의 하나를 지울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우리 오남매의 나이로 보아 더 늦어지면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힘들 수 있음을 생각하니 이번 여행이 참으로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만날 때까지 우리 오남매 모두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