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제7구간, 성심원~운리, 2026.04.26

by 인문학 이야기꾼

이번에 걸은 지리산 둘레길은 제7구간(성심원~운리)이다. 거리는 13.4Km로 길지 않은 구간이지만 1,100미터에 이르는 웅석봉의 8부 능선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지리산 둘레길에서 난이도가 가장 어려운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 대장의 권유대로 등산스틱도 준비하고 간식도 넉넉히 준비했다. 인생길도 그렇지만 길이란 쉬운 길만 있으면 어려운 길도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가짐도 단단히 준비하고 집은 나섰다.

9시에 부산을 출발하여 11시 10분에 이번 구간의 시점인 ‘성심원’에 도착했다. 지난 2월에 걸은 6구간의 종점인 성심원에 7구간의 시점으로 다시 섰다. 주위가 온통 신록의 싱그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성심원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지리산 둘레길 7구간에 올랐다.

성심원 앞에는 경호강이 흐르고 있다. 성심원 뒤쪽에는 높은 산이 성심원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성심원 식구들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경호강을 건너야 한다. 경호강을 건너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나룻배이다. 다리가 놓이고 나룻배가 자취를 감추었으나 태풍으로 다리가 소실되는 바람에 철선을 구입하여 성심원 식구들의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이었다고 한다. 그 철선은 현재 성심원으로 옮겨져 그들의 삶의 애환을 대변하고 있다.

나루터.jpg <성심원 식구들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나루터>

경호강을 왼쪽에 두고 좌우에 신록의 나무들을 거느린 경호강 물길을 따라 걸어간다. 길은 어천 갈림길에서 둘로 나뉘었다. 오른쪽 길은 ‘아침재’를 향해 직진하는 오르막길이며, 왼쪽 길은 어천마을로 돌아서 ‘아침재’로 가는 우회로이다. 산행 대장은 우리 일행을 직진 코스로 안내했다. 웅석봉을 넘어야 하는 일행의 체력을 고려한 듯싶었다.

아침재를 향해 직진하는 길은 경호강을 등지고 숲길을 향해 나 있었다. 직진하는 길은 초입부터 가파른 임도였다. 길 좌우의 나무들은 옅은 초록의 나뭇잎이 차츰 짙어가는 중이었다. 경사는 가팔랐지만 임도가 주는 편안함과 신록의 나뭇잎을 감상하며 오르기 좋은 구간이었다.

일행인 ‘길산’ 님의 나무 품종에 대한 해설이 이어졌다. 나뭇가지가 계단을 이루듯 층층이 수평으로 펼쳐진 ‘층층나무’, 꽃의 모양이 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병꽃나무’, 나무줄기가 학의 다리처럼 미끈하게 생겼다고 명명된 ‘학다리나무’도 길산 님의 해설에 나오는 수종이다. 나무의 잎이나 꽃 모양이나 줄기만 보고도 나무의 이름은 물론 나무의 특성까지 줄줄 해설해 주는 길산 님의 내공에 감탄하면서 가파른 임도를 올랐다.

오르막길.jpg <아침재를 향해 가파른 임도를 따라 오르는 모습>

신록의 경치에 취한 채 걷다보니 ‘아침재’라는 벅수가 눈앞에 나타난다. ‘아침재’는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비치는 고개’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아침 해가 뜨면 풍경이 아름다운 고개’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을 넘어 다니도록 나 있는 길을 ‘재’라고 할 때, 재에 올랐다는 것은 내려간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아침재’는 웅석봉을 올라야 하는 초입에 있는 고개이다. 그러니 아침 햇살이나 아침 풍경 등의 해석보다는 ‘웅석봉을 넘기 위해서 이곳을 아침에 넘어야 하는 고개’라는 뜻의 해석이 타당할 듯하다.

아침재를 지나면서 아래쪽을 바라보니 어천 갈림길에서 직진하느라 보지 못한 어천마을이 신록의 싱그러움 속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천마을은 예전에는 ‘어리내’라 하고 한자로 ‘우천(愚川)’으로 부르다가 ‘어천(漁川)’으로 변했다고 한다. ‘어리내’의 ‘어리’가 ‘어리석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기에 ‘우천(愚川)’으로 한자화했다가 웅석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온갖 물고기들이 서식했기에 ‘물고기가 많이 살고 그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냇가 마을’이란 뜻의 ‘어천(漁川)’으로 바뀐 듯하다.

어천마을.jpg <아침재에서 바라본 어천마을의 모습>

산을 넘어 다니도록 나 있는 길을 지칭하는 우리말로 ‘고개’, ‘재’가 있고, 한자어로 ‘령(嶺)’, ‘치(峙)’, ‘현(峴)’이 있다. ‘고개’는 산이나 언덕을 넘어 다니는 길을 통칭하는 가장 폭넓은 우리말이다. 비교적 낮은 산이나 언덕을 넘는 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재’는 사람이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를 의미한다. 문경새재나 화개재가 대표적이다.

‘령(嶺)’은 한자로 ‘재 령’자이며, 산맥을 가로지르는 가장 크고 험한 고개를 뜻하며, 산맥을 넘는 주요 간선 도로인 경우가 많다. 대관령, 추풍령, 한계령, 조령 등이 대표적이다. ‘현(峴)’은 한자로 ‘고개 현’자이며, 큰 산맥보다는 마을 근처의 야산이나 언덕 정도의 고개를 부를 때 주로 사용한다. 아현, 논현, 문현, 토현 등이 있다. ‘치(峙)’는 한자로 ‘우뚝솟을 치’자이며, 높이보다는 경사가 아주 급하고 가파른 고개를 뜻한다. 정령치, 팔랑치, 우금치 등이 있다.

‘재’를 넘으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아침재를 지나도 오르막은 계속된다. 임도로 조성된 오르막을 따라 웅석봉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오른쪽으로 ‘웅석사’라는 조그만 암자가 사방으로 솟아있는 산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웅석사 입구에 표지석이 없었다면 전원주택으로 오인할 만했다.

웅석사2.jpg <자연 그대로의 순박함을 간직한 웅석사 표지석과 죽단화>

‘웅석사’라는 표지석의 글자도 빗돌 자체도 지리산을 닮아서인지 가공미라고는 전혀 없이 자연 그대로의 순박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웅석사 표지석 옆에는 죽단화(竹團花)라는 노란 꽃이 만개해 있었다. 줄기는 대나무를 닮고, 꽃은 둥글게 뭉쳐 피는 꽃이라 ‘죽단화’라 명명했다. 사찰 마당이나 담장에서 죽단화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죽단화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황금색이 상징하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의 이미지와 잘 맞아 많이 심었기 때문이리라.

어천계곡을 향해.jpg <웅석사를 지나 어천 계곡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

웅석사를 지나 웅석봉을 향해 오르는 임도는 흙길과 포장길이 반복하며 이어졌다. 길도 신록으로 물들어 있어서 신록의 시원함을 눈에도 발에도 담을 수 있어서 걷는 맛이 났다. 길은 얕은 계곡을 건너도록 나 있었다. 벅수 이정표는 이곳이 ‘어천계곡’임을 말하고 있었다. 계곡물에 손을 담그며 시원하다고 만족감의 미소를 짓는 일행의 모습이 신록을 닮아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어천계곡 벅수는 남은 길이 9.5km라고 알리고 있었다.

어천계곡1.jpg <어천 계곡을 건너는 모습>

어천계곡을 건너 신록 가득한 산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좁은 산길은 급격히 가팔라졌다. 배낭에 꽂아 두었던 등산스틱을 꺼내 양손에 잡고 둘레길이 아닌 본격적인 등산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산을 올랐다. 계곡에 작은 폭포라도 있는지 계곡의 청정한 물소리가 한참이나 일행을 따라왔다. 물소리가 잦아들 즈음 산새 소리가 물소리를 대신해 가파른 길을 오르는 일행의 피로를 덜어간다.

가파른 산길 좌우의 숲은 신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깊은 산의 적막과 겨울 산의 추위를 온몸으로 견디며 마침내 터져 나온 신록의 이파리들이 적막과 고요를 신록의 향연(饗宴)으로 바꾸어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고요가 있으면 소란이 뒤따르고, 적막이 있으면 화려함이 뒤따른다. 우리가 둘레길을 걷는 것도 일상의 고요와 마음의 적막을 자연의 힘을 빌려 내면을 소란하고 화려함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겠는가.

신록의 산.jpg <겨우내 인내한 깊은 산의 나무들이 신록의 향연으로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오르니 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계단 위쪽에서 먼저 도착한 산행 대장이 어서 오라고 응원하고 있었다. 산행 대장은 점심도 먹지 않고 후미의 일행을 기다렸다.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일행 모두가 ‘웅석봉 하부 헬기장’에 도착했다. 벅수 이정표는 종점인 운리까지 8.6km가 남았음을 알렸다. 어천계곡에서 한 시간을 넘게 올라왔는데, 겨우 1km 남짓 왔을 뿐이다. 물리적 가성비는 낮았지만 깊고 높은 산이 주는 태곳적 아름다움의 가성비는 높았다.

헬기가 내리기에는 좁은 공간일 듯했지만 가장자리에 정자가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게 번듯한 정자를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과 노고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다시 들었다. 많은 등산객이 가파른 산을 오르느라 지친 심신을 이곳 정자에서 물 한 모금으로 혹은 점심 도시락으로 달래면서 재충전의 쉼을 얻었으리라. 우리 일행도 정자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었다. 김치도 나누고 과일도 나누고 비타민도 나누어 먹었다. 무겁게 지고 온 음식들을 아낌없이 내놓은 일행의 마음이 더해져 가파른 산을 오르느라 시장한 배는 금세 채워졌다.

웅석봉 헬기장의 정자.jpg <웅석봉 하부 헬기장에 우뚝 서 있는 정자는 가파른 산을 오르느라 지친 길손들의 심신을 달래주었으리라>

웅석봉(熊石峰)은 곰바위 봉우리란 뜻이다. 웅석봉이라는 지명에는 두 가지 정도의 유래가 전해진다. 웅석봉은 산세가 험하고 가팔라 곰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웅석봉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정상 부근의 거대한 바위 형상이 마치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웅석봉이라 명명했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러나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에는 곰이 사람(웅녀)으로 변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의 관계에서 단군을 낳고, 그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되어 있다. 신화에 차용될 만큼 곰은 신령스러운 동물이었다. 그런 곰을 봉우리와 연결한다는 것은 그 봉우리를 그만큼 신령스럽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웅석봉은 신령스러운 산이고 신령스러운 봉우리라는 인식이 이름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 내려오는 길은 숲길 임도로 조성되어 있었다. 일행 중 일부가 다리에 쥐가 나 다소 지체되긴 했지만, 내려오는 임도의 경사가 완만해 내려오는 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주위의 신록이 없었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길이었지만 신록의 이파리들이 그 지루함을 걷어가 버려 일행은 눈과 마음에 신록의 싱그러움을 마음껏 담으며 내려올 수 있었다.

하산길2.jpg <신록의 싱그러움을 온몸에 담으며 내려오는 모습>

내려오다 보니 탁 트인 시야에 넓은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시냇물이 고여 있는 저수지라는 뜻의 ‘청계저수지’다. 산청 지역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점촌마을’이 수몰되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서 만나는 넓은 저수지가 주변의 산세와 어우러져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지만, 그 풍경 이면에는 수몰민의 아픔이 서린 곳이라는 생각을 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촌마을(店村)의 점(店)은 ‘가게 점’ 자이다. 가게를 뜻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옹기점처럼 물건을 만들어 파는 곳을 의미했다. 이곳 점촌마을도 지리산의 좋은 흙과 땔감을 이용해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었을 텐데 근대화라는 이름에 밀려 수몰되고 말았다.

저수지 위쪽으로 풍채 좋은 전원주택과 펜션들이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었다. 수몰된 마을의 주민들이 옮겨왔을 수도 있고, 풍광에 반해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일 수도 있고, 풍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쉼의 공간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은 집들일 수도 있다.


청계저수지1.jpg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시원한 풍경을 자아내는 청계저수지에는 수몰민의 아픔이 서려 있다>

청계 저수지를 지나 일행은 7구간 종점인 운리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운리(雲里)마을은 탑동마을과 원정마을을 포함하는 지명이다. ‘탑이 있던 동네’라는 뜻의 탑동마을은 신라시대 유명한 사찰이었던 ‘단속사’가 있던 터에 조성되었다. 단속사라는 사찰은 소실되고 3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 화려했던 옛날을 증언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단속사지 3층석탑은 동서 쌍탑이라고 기록되었는데, 3층석탑 한 기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 사연이 궁금할 뿐이다.

탑동마을3.jpg <하산길에 바라본 탑동마을의 모습>

단속사 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인 ‘정당매(政堂梅)’가 울타리 넘어까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산청에는 남명매, 원정매, 정당매라 명명된 유서 깊은 세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 정당매는 고려말 강회백 선생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심은 나무인데, 훗날 그가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 오르자 사람들이 이 나무를 ‘정당매’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그 내력이 잊힐 것을 염려하여 강회백 선생의 후손이 나무 옆에 ‘정당매각(政堂梅閣)’이라는 비각을 건립하고 그 안에 ‘정당매라는 매화를 강선생(강회백)이 손수 심었다’는 내용의 비석을 세워 관리해 오고 있다.

원래 강회백이 600여 년 전에 심었던 나무는 수명이 다하여 고사(枯死)하고, 현재의 나무는 그 가지의 일부를 접목하여 자라난 후계목이다. 후계목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노거수(나이가 많은 나무)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아 키워낸 나무를 말한다. 정당매 원래 나무의 가지를 잘라 다른 나무 밑동에 접붙여 키워 이곳에 심었다고 하는 내력이 정당매 앞의 빗돌에 ‘후계목 식재’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원래 정당매의 후계목에는 벌써 굵은 대추 크기의 매실이 영글고 있었다. 조상의 덕으로 자라는지 매실 가장자리에는 붉은빛마저 감돌고 있었다.

정당매2.jpg <원래의 정당매가 고사(枯死)하자 그 가지의 일부를 접목한 후계목이 정당매를 대신하고 있었다>

차도와 인도가 공유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조금 걸어서 지리산 둘레길 7구간의 종점인 운리(雲里)마을에 도착했다. 운리(雲里)마을은 ‘구름이 머무는 곳’, ‘구름 속의 마을’이라는 평화롭고 아늑한 이름을 간직한 마을이다. 웅석봉에서 내려온 구름이 마을에 머물다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7구간은 웅석봉을 오르는 힘든 구간이었지만, 신록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기분으로 풍경을 감상하며 걸었다. 늘 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는 일상에서의 일탈이 주는 자유가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든 것 같았다. 오르막이라는 힘든 여정 끝에 맞이하는 풍경이 풍경을 더 우아하고 고상하게 만든 것도 같았다.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밀어내고 텅 빈 마음으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내공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 것도 같았다. 7구간을 완주했다는 마음의 뿌듯함과 함께 몸은 시장기를 알렸다.

버스로 산청군 삼장면에 위치한 ‘세자매밤꽃식당’으로 이동했다. 덕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이 식당은 꽃으로 단장한 조경이 좋았고,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풍광이 좋았다. 조경과 조망의 맛이 음식 맛 못지않게 좋았다. 홍시로 맛을 더했다고 하는 ‘지리산흙돼지 홍시 제육볶음’으로 저녁을 먹었다. 분위기와 시장기가 어우러져 맛있게 먹었다.

image.png <‘세자매밤꽃식당’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주변 풍광이 음식 맛을 더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생초국제조각공원’을 관람했다. 이곳 관람은 애초 계획에는 없었지만, 산행 대장의 배려로 전국 최대 꽃잔디로 유명한 이곳을 관람하게 되었다. 시대와 대륙을 넘나들며 조각된 작품들도 볼만했지만, 마치 그림을 그린 것처럼 펼쳐진 분홍색과 하얀색과 보라색 꽃잔디를 보는 눈은 화려함으로 채워진 듯했다.

얕은 능선을 채운 꽃잔디는 마치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형형색색의 파도 같았다. 파도는 끊임없이 새로운 색과 새로운 모습의 물결로 얕은 능선을 만들기를 반복하며 넘실대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꽃잔디 사이로 나 있는 야자수 매트 길을 따라 걸으며, 눈으로는 조각품과 산철쭉과 꽃잔디를 보고, 코로는 수백만 송이의 꽃들이 내뿜는 향기를 맡았다. 이렇게 좋은 풍경은 지리산 둘레길이 주는 덤이었다. 그저 얹어 주는 덤이 둘레길 걷기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생초국제조각공원.jpg <형형색색의 꽃잔디가 그림을 그린 듯 얕은 능선에 넘실대고 있었다>

꽃잔디 관람으로 귀가 시간이 다소 늦어졌다. 집에 오니 밤 10시였다. 만보기에는 31,000보가 찍혔다. 오늘 신록의 향연에, 화려한 꽃잔디의 잔치에 초대해 주신 산행 대장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또한 힘든 길 함께 오르고, 먹거리 나누어 먹으며, 좋은 꽃구경 함께 한 일행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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