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韓非子)’는 ‘천리마(千里馬)’ 이야기도 합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좋은 말입니다. 천 리 밖에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천리마가 필요합니다. 천리마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천리마가 나올 때까지 백 년이든 천 년이든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보통 말을 천리마처럼 만들어야 할까요? 현실적으로 천리마를 기다릴 수가 없기 때문에 천리마를 만들어야 합니다. 천리마의 속력으로 하루에 천 리는 못 가더라도 백 리는 갈 수 있는 말은 있습니다. 이런 말들을 10마리 20마리를 길들여 이어 달리게 한다면 천리마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친구는 1시간 공부해서 100점을 받았는데 나는 1시간 공부해서 50점 받았어요.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해야 합니까? 아니면 2시간, 3시간 공부해서 꼭 100점을 받아야 합니까? 말도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이 있고 하루에 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이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루에 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을 하루 천 리를 달리게 한다면 죽을지도 모르지요. 하루에 백 리를 달리면서도 제 임무를 다하는 말이 있듯이, 하루에 1시간 공부해서 50점을 받으면서도 학생의 본분을 다한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는지요.
『중용(中庸)』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 ‘다른 사람이 한 번에 그것을 능히 한다면 나는 백 번을 해보고, 다른 사람이 열 번에 그것을 능히 한다면 나는 천 번을 해 본다.’는 뜻이지요. 물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하는 그 과정에 흥미를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의 과정에서 상처를 받고 자괴감을 느낀다면 불확실한 미래의 목표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중용(中庸)』의 이 구절보다 이철수 판화가의 ‘가난한 머루송이에게’라는 판화를 더 좋아합니다. 판화이기에 머루송이 그림도 있으나 글만 옮겨 보았습니다.
겨우
요것 달았어?
최선이었어요.
……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이철수, ‘가난한 머루송이에게’
포도가 머루에게 ‘겨우 요것 달았어?’라고 묻습니다. 포도는 ‘인일능지(人一能之)’하는 사람이지요. 머루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입니다. 머루는 포도처럼 되기 위해 ‘기백지(己百之)’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결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머루는 할 말은 많습니다. ‘야! 너는 땅도 비옥하고, 햇볕도 많이 받고, 너의 주인이 물도 많이 주지만, 나는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물도 없고 햇볕도 없잖아. 날 무시하지 마!’라고. 그러나 머루는 ‘최선이었어요’라고 할 뿐입니다. 아마 머루는 척박한 땅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행복했었나 봅니다. 그러니 이런 초라한 결과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에 포도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포도와 머루의 태도가 멋있지 않습니까?
출근길 편도 1차선에서 포클레인을 만납니다. 이 녀석이 어찌나 천천히 가는지 마음이 더 급해집니다. 아침부터 이 녀석이 내 길을 막고 있다며 혼잣말로 투덜대죠. 머루송이가 생각났습니다. 이 녀석이 일부러 천천히 간 것이 아니죠. 뒤 따르는 차들에게 미안해 하면서 나름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포클레인도 사람도 현재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는지요.
‘기백지(己百之)’, ‘기천지(己千之)’하여 포도의 결과를 말들어내고야 말겠다는 『중용(中庸)』의 생각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현재의 희생이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인 셈이지요. ‘기백지’, ‘기천지’의 과정이 행복하고 재미있다면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기백지’, ‘기천지’의 과정이 재미없는데 억지로 한다면 자칫 포도의 자질을 머루의 결과로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금정산(金井山)에는 바위틈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소나무들이 많습니다. 금정산 남문 근처에 천년이 넘은 소나무가 있습니다. 나이가 천 살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습니다. 이 소나무가 천년 세월을 내일을 위해 살았겠습니까? 내일은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견뎌 냈겠습니까? 아니죠. 척박한 환경이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면서 지금 행복감을 느끼면서 천년을 살아왔고, 오늘도 살아내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우람한 나무들과 자신을 견주면서 자신의 초라함을 한탄하고 살았다면 천년 세월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그 환경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렇듯 아름답게 천년을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머루송이에게도 소나무에게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저에게는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동생은 초등학생이었지요. 동생은 저를 그렇게 따랐습니다. 아니 저의 뒤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중학생인 우리 친구들은 제 동생이 따라오는 것을 마뜩찮아 했습니다. 혹시 멀리까지 놀러 가거나 달리기라도 할라치면 동생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지요. 특히 콩 서리를 한다든지 약간은 음험한 계획이 있는 날은 동생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야! 오늘만 안 따라오고 내일부터 계속 따라올래 아니면 오늘 따라오고 내일부터 계속 안 따라올래?” 동생의 답은 한결같았어요. 오늘만 따라간다는 것이었지요. 내일 되면 어제의 약속은 간곳없고 또 따라오는 것이었어요. 아마 동생은 그때부터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는 진리를 알았던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