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가치의 소중함
고3 담임을 할 때였습니다. 학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축구를 너무 열심히 무리하게 하여 저녁에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공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축구를 못하게 말려 달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학생이 국어 시간에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점심 시간이나 저녁 시간 등 쉬는 시간에 하는 것이라 담임이라 하더라도 말릴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잘 알겠습니다. 주의를 주고 말려 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녀석은 아무리 뙤약볕이라도 축구를 하는 녀석이었어요. 그 학생을 불렀습니다. ‘축구가 재미있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뭐가 제일 재미있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테니스, 바둑, 독서 등을 열거했지요. 그랬더니 이 녀석이 ‘선생님한테 누가 테니스는 치지 말고 독서만 하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어요. 순간 앞이 캄캄했지요. 테니스를 못 치면 독서가 제대로 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이 녀석은 “축구를 하면서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공부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학생은 축구를 했기 때문에 피곤해서 공부할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하지 않아도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잠을 잤던 겁니다.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야간자습을 하고 학원 한 군데 들렀다가 집에 가면 자정인데 그 시간이 잠잘 시간이지 공부할 시간이겠습니까? 그 학생에게는 축구가 지금의 행복인데 그 행복을 빼앗으면 무슨 힘으로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 후 며칠 동안은 이 녀석이 자정 무렵 집에 가서 엄마 주무실 때까지는 책상에 앉아 있어나 봐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의 말이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셨나 봐요. 저는 이 녀석에게 ‘축구가 재미있냐’고 물어만 보았을 뿐인데 말이죠.
익숙한 산길을 따라 산책을 합니다. 어젯밤에 비가 와서 땅이 집니다. 지난번에 갔던 길을 고집합니다. 땅도 엉망이 되고 신발도 엉망이 됩니다. 땅도 신발도 엉망을 만들면서 익숙한 길을 고집해야 할까요? 조금만 돌아가면 비에 씻긴 풀잎의 싱그러운 소리를 밟으며, 나뭇잎의 싱그러운 소리를 들으며 갈 수 있는데도 말이죠. 어제의 질서보다 어제의 생각보다 더 좋은 질서와 생각이 있는데도 어제만을 고집해야 할까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는 것은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익숙함을 기준으로 현재의 유용성을 포기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지요?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혀 지금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를 『한비자(韓非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한비자(韓非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춘추시대 정나라에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새 신발을 사기 위해 자신의 발의 모양을 헝겊 위에 탁본을 떴어요. 신발 가게에 도착해서야 탁본을 집에 두고 온 것을 알았지요. 다시 집에 가서 탁본을 가지고 왔으나 이미 파장이 된 후였지요.
차치리는 실제 발보다 탁본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탁본이 신발의 기준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은 신발을 사기 위해서 신발에 맞는 탁본이 꼭 필요하다고만 생각했지 직접 신어보고 신발을 살 생각은 못했나 봐요. 직접 신어보는 것이 탁본보다 훨씬 정확한데도 말이죠. 아마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어머니도 어쩌면 학생의 지금의 삶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축구를 하면 피곤하고 피곤하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어머니의 탁본을 기준으로 학생의 삶을 판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