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by 인문학 이야기꾼

집 근처에 윤산(輪山)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습니다. ‘구월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원은 이렇습니다. ‘구르다’의 옛말은 ‘구블다’였고 ‘구블다’가 ‘구을다’로 바뀌면서 ‘구블산, 구을산, 구월산’으로 이상하게 산이름이 바뀌었죠. 이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인 ‘구르다’의 의미를 살려 ‘바퀴 륜’자를 사용하여 ‘윤산(輪山)’이라고 한 거죠. 저는 이 산을 자주 찾습니다. 산행(山行)이나 유산(遊山)이 아니라 산책하기 위함이지요. 크지 않은 산이지만 다양한 식물들과 다양한 소리들을 눈으로 귀로 어루만지면서 생각들을 만들었다 지웠다 합니다. 어쩌다 만든 좋은 생각은 메모도 하기 전에 증발해 버리기가 일쑵니다. 다양한 생각이 어우러지기 좋은 곳입니다. 윤산 언저리에는 벚나무들이 많아 해마다 벚꽃 축제가 열릴 정도입니다. 가을 벚나무 길을 따라 산책하노라면 도종환 시인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시 사이에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도종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지금 화자의 인생의 시간은 계절로는 가을이고 하루로는 늦은 오후입니다. 곧 낙엽이 지고 해가 지듯 화자의 삶도 질 것입니다. 지나온 삶이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힘겨웠지만 화자는 담담하게 지금을 받아들입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아름다운 노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죠.

해가 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위해 무엇을 투자하겠습니까?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지금 빨갛게 물든 잎들이 그저 소중할 뿐입니다. 저녁노을을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하는 것은 지금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저 아름다운 날이 남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지금이 감사할 뿐입니다. 지금이 오전 열 시라면 열 시에 맞게 최선을 다하고, 지금이 오후 다섯 시라면 다섯 시에 맞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요. 여섯 시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온다면 그 자체로 고마울 따름이지 여섯 시의 저녁노을을 위해 지금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인생은 되는 대로 살아라.’(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의 『밤은 책이다』에서 인용)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오늘대로 성실하게 살고, 내일은 내일대로 또 행복하게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게 사는데, 지금 성실하게 사는데 어찌 인생이 되는 대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소중하게 사는 삶이 인생 전체의 삶을 소중하고 행복하게 만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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