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세계의 반대편에서 살기
무더운 여름날이다. 중복인 걸 알라는듯이 햇빛은 강하게 머리부터 익혀갔다. 그 더운 날씨를 뚫고 은행을 방문했다. 어릴 적에는 피서지로 유명했던 은행이었기에 단순히 사람이 붐비리라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예상밖으로 손님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은 3명 남짓. 둘은 통화 하느라 바빴고 한 직원만이 할머니 한 분을 응대하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을 예상했기에 들고간 책은 펼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앞의 할머니와 직원의 대화는 끝날줄을 몰랐다.
금방 끝날 것을 기대하고 책을 펼치지 않아 무료했던 난 그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됐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입출금 알림이 할머니 핸드폰에 오지 않는 문제로 대화하는 듯 했다. 그 때문에 내 차례가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직원의 말은 매우 잘 들렸다. 직원의 답답함이 나한테까지 전해왔으니까. 직원은 끊임없이 할머니의 핸드폰에 데이터가 부족해서 입출금 알림이 오지 않는다고 내가 들은 것만 3번 이상 설명했다.
"고객님. 고객님 핸드폰에 데이터가 없으니까 알림이 안 오는 거예요.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요."
"아뇨. 저희가 뭘 해드리는 게 아니라 고객님 핸드폰이 인터넷이 돼야 되는데 지금 인터넷이 안 돼서 그래요"
이런 말을 직원은 거듭 반복했다. 할머니는 집에선 되는 인터넷이(아마 자녀든 누구든간에 와이파이를 설치해줬을 것이다.) 왜 밖에서는 안 되는지 이해를 못하는 듯 했다. 할머니의 말은 잘 안 들렸기에 대화의 맥락은 잘 모르겠지만 직원이 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 할머니도 인터넷이 안 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듯 했다.
할머니는 10분이 지나서야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출발했지만 난 그 할머니가 절대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내 번호 67번이 떴고 할머니와 씨름하던 직원은 나를 불렀다. 나는 디지털 OTP를 갱신하려고 방문했다. 난 OTP가 뭔지도 잘 모르지만(지금와서 찾아보니 One Time Password, 임시 발급 비밀번호라 한다.) 직원은 나를 훨씬 편하게 대했다.(목소리가 달랐다. 우선 목소리가 작아졌고 부드러웠다.)
직원은 디지털 OTP가 더 편할 것이라고 나에게 설명했고 난 직원이 하라는대로 차근차근 내 인터넷이 잘 되는 핸드폰을 꺼내어 우리은행 앱을 열고 올바른 메뉴를 찾아서 연 뒤에 직원이 입력하라는 코드도 한번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입력했다. 직원은 디지털 OTP가 얼마나 편한지 나에게 간단하게 설명했고 난 그 설명을 이해했다. 내가 기존에 쓰던 카드 OTP보다 편리해보였다.
"네 다 되셨어요. 이제 가셔도 돼요."
나를 처리한 업무가 앞선 업무보다 훨씬 복잡한 것일테지만 난 5분만에 원하는 것을 얻어 은행을 나섰다. 나는 친절했던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앞선 할머니가 떠올랐다. 간단한 문제를 두고(물론 나와 직원에게 간단한) 답답했을 직원과 끝까지 이해를 못한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문제는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우선 난 할머니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를 3배는 빠르게 끝냈고, 직원과 서로 친절한 대화를 나눴으며 내가 원하는 것도 얻어냈다.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간단한 문제를 나보다 3배는 느리게 끝냈고 직원과 답답한 대화를 나눴으며 원하시는 것도 끝내 얻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직원이 할머니에게 불친절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 할머니라 귀가 잘 안 들리시니 크게 말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은 반복적으로 설명하다보면 자연스레 목소리는 커지기 마련이니까.
은행은 아마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돈을 쌓아두고 있는 곳일 테니까 난 은행이 격차를 보여준다면 빈부격차를 보여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내가 은행에서 느낀건 다른 격차다. 소위 말하는 정보 격차. 이 정보 격차는 서로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누군가와 답답한 대화를 하게 만들고 시간을 더 쓰게 만든다. 그리고 이 답답함은 끝내 문제 해결을 기피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할머니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저 할머니라면 3번 찾아올 일이 있으면 그냥 한 번만 찾아올 것이다.(자꾸 혼나는 것 같아 답답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은행에 1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로 방문하는 사람이다. 나머지는 다 내 손바닥 위에서 해결이 가능하니까.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밤 11시 30분에도 누군가에게 돈도 보낼 수 있고 누가 돈을 보내면 알림도 정확히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알림이 안 오면 와이파이를 점검해 보겠지. 하지만 아까 이 할머니는 은행에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방문하실 것이다. 걸음도 나보다 느리신데 돌아다니기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돌아다니셔야 한다.
지금은 수많은 정보 처리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이루어진다. 오래된 것 같지만 불과 10여년쯤 됐을 뿐이다. 디지털은 계속해서 발전해왔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은 은행이든 음식 주문이든 완전히 시대를 뒤바꿔 놓았고 아직도 뒤바뀐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힘겹게 사회에서 자기 몫의 일을 해나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 할머니에 대한 내 얕은 안타까움과 더불어 느낀 것은 다시 시대가 뒤바뀔 때 난 그 뒤바뀐 시대에 살고 있을까, 그 반대편에 살고 있을까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앞으로 십수년은 더 살테고 내가 살면서 두 세번은 더 뒤바뀔지 모르는데 난 반대편 세계에서 거꾸로 매달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그 반대편에 있을 때 그 뒤바뀐 세계의 반대편에서 나에게 손 내밀어줄 사회가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들었을 때...최선은 내가 뒤바뀌는 사회를 열심히 쫓아가야겠다는 씁쓸한 생각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