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권력과 개인은 인간 개인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오늘 매우 오랜만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했다. 평일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서대문 형무소의 공간에서 아마 사람들의 가장 많은 이목을 끄는 것은 지하 고문실과 독방, 수감실이라는 장소일 것이다. 지하 고문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인간을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할 것인가를 인간들이 머리 맞대어 만들어 놓은 곳이며 독방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할 것인가를 머리 맞대어 만들어 놓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저 좁은 수감실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이 더운 여름날에 다닥다닥 붙어 벌레들과 함께 생활하고 병들어갔음을 생각하면 이것을 지켜보는 내 삶은 너무나 다행스럽다못해 미안하게 느껴지게 한다.
매우 오랜만에 방문했음에도 이렇게 의식하고 고민하고 방문했던 것은 처음인지 참 낯선 것도 많았다. 역사에 무지했던지, 내가 몰랐던 사실 중 하나는 서대문 형무소가 광복 이후에도 계속 교도소로 활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나에겐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탄압했던 곳이었는데 광복 이후에도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를 탄압한 곳이라는 의미가 더해진 셈이다.
광복 후에도 이 공간에서 끝나지 않았을 비명소리를 떠올리면 이 공간을 단순히 민족적인 개념으로만 보기엔 너무도 좁은 공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점을 돌아봤을 때 서대문 형무소는 민족의 개념을 넘어 지배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 개인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제국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외쳤던 수많은 조선인들을 고문하고 가둬놓았고 해방 후 독재 정권은 정권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외쳤던 수많은 한국인들을 고문하고 가둬놓았다.
일제 강점기가 35년, 군사 독재 정권도 수십년을 채 가지 못했으니, 고작 수십년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에서 피를 흘렸나. 지하실에서 영문도 모른채 고성과 고통을 참아갔으며, 시간도 알 수 없는 지하 독방에 갇혀 옆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견뎌왔으며, 살짝만 움직여도 옆사람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것 같은 수감실에서 벌레들의 공격을 견뎌가며 쪽잠을 청했겠나.
이들을 직접적으로 탄압한 사람들도 특별한 목적 의식보다 별다른 저항 의식 없이 제국주의와 독재의 시스템에서 이유도 모른채, 정의로운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으며 고문을 자행했을 것이다. 마치 일본 제국을 위해 애국적인 큰 일을 하고 있음을, 공산당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애국적인 활동을 하고 있느라고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Patriotism varies, from a noble devotion to a moral lunacy.
(애국심은 도덕적 헌신에서부터 도덕적 광기까지 다양하다.)
- W.R. Inge
영국의 성직자였던 잉게는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라 실제로 이 말을 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이 말만큼 이 공간을 설명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애국심으로 자신의 육체를 던저 헌신한 사람들과 애국심으로 도덕을 잃어버린채 광기만 남아버린 사람들이 함께 있었던 공간.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도, 아니 이 작은 동네와 학교에도 이런 광기는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옳은 일이라 믿으며 손쉽게 누군가를 공격한다. 걔는 그런 짓을 당해도 싼 놈이라며, 그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
우리가 이 공간에서 배워야할 교훈은 "나쁜 놈들. 이런 놈들은 자기도 당해봐야 돼."가 아니라 인간이 잘못된 믿음으로 얼마나 도덕적으로 나약해질 수 있는지, 나는 그러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일지도, 이 공간에서 느껴야 할 감정은 민족적, 국가적 분노보다 인간의 나약함과 그 나약함에 쓰러져 간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평범한 악이 나의 속에도 언제 나타날지 모름을 기억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