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었다. 영어 원문 제목은 "Survival of the friendliest"인데 "Survival of the fittest"를 살짝 비튼 것으로, 영어 원문 제목이 훨씬 와닿는다. 즉, 적자생존(환경에 적응한 종이 살아남는다)이 아니라 다른 종에 다정할 수 있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책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현재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는 서로에게 다정해질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라리는 상상의 공동체가 호모 사피엔스가 우세종이 된 가장 강력한 근거로 보듯이 이 책에선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를 결집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능력을 얻는 과정을 자기 가축화라고 보았다.
자기 가축화는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동물들 중에서도 인간에게 적대심을 느끼지 않는 종들이 인간과 가깝게 지내면서 인간과 협력하고 소통했는데 이들끼리 교배가 이루어지면서 인간에게 친근한 종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책의 포인트는 이 과정을 인간도 겪었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자기 가축화를 겪으면서 자기 친족이 아닌 사람들과도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양보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집단을 형성하도록 진화했다. 이 능력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자기보다 훨씬 거대한 종들도 사냥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의 지배 종이 된다.
문제는 이 친숙함을 나눈 집단이 외집단이나 외부 생명체에 대해선 두려움과 적개심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친족도 아닌 사람들이더라도 자기에게 친숙하고 친근함을 나눈 존재들과 있을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처음 본 대상에겐 위협을 느끼고 이 위협을 이겨내기 위해 공격적인 행동도 한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 집단이 아닌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며,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백인들은 유색 인종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심지어 동물원에 넣어 구경거리로 삼곤 했다. (지금으로선 매우 잔인해 보이는 일일지 모르지만 아예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면 지금 동물원에 동물을 넣어 구경하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흑인이나 중동 사람들을 유럽인, 미국인에 비해 지능이 낮거나 공격적이거나 감정 조절을 잘 못한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타 집단과 소통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사고를 강화한다. 가령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며, 타 집단에 대해 배타적이고 자신들의 생각과 맞는 뉴스만 접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공고히 하며 여전히 유색인종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유지한다.
작가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타인에 대한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을 제시한다.
작가는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언급하는데 그중 한 가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도와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직업이나 학력, 계층 배경이 전부 달랐지만 단 한 가지 예전에 유대인과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유대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작가는 서로 협력한 것이 우리 종이 지금까지 안전하게 살아올 수 있는 배경이라는 것을 밝히며 더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우리를 더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는지가 아닌 얼마나 많은 친구로 만들어야 하는지로 평가해야 한다고 글을 마무리한다.
이 책의 인상적인 점은 도덕적인 당위성을 과학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을 배려하고, 잘 협력해야 함을 가르치지만 사실 왜 그래야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을 듣진 못했다. 그냥 그렇게 구는 것이 착한 어린이였고, 착한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문제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말할 때의 "사람"의 범주를 생각하는 것이 개개인마다 다르다는 점 때문에 우린 모두를 배려하지 않고 여전히 적대감이 사회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집단을 손쉽게 나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나랑 친한 애와 안 친한 애, 혹은 싫은 애", "나한테 잘해주는 어른, 나를 못살게 구는 어른"으로 구분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사람들은 배려하고 협력해야 하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친숙한 대상의 사람들로만 한정 짓고 외부 집단의 사람들은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이 책에 따르면 "비인간화") 특히 혐오가 점점 증가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점이다. 어른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의가 부족하고 성실하지 못해"라고 지적하며 젊은 층은 어른들을 "꼰대, 틀딱"이라는 용어로 비하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은 묶여서 맘충이라고 비난받으며, 어린 아이들은 "급식충, 잼민이"라는 비하를 받는다.(물론 급식, 잼민이는 비하의 의도가 없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런 혐오 현상은 사회 집단 간의 소통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생각이 굉장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성별 혐오는 남초 집단, 여초 집단 커뮤니티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남초 집단에선 여성과의 소통이 없고 여초 집단 커뮤니티에선 남성과의 소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곳에 여성이나 남성이 있다 한들, 다른 남성, 여성과 손쉽게 선을 긋는다. 가령 "우리나라에 ~님 같은 여자분만 있으면 좋을 텐데요."나, "~님 같은 남자 분만 있었어도..."와 같은 말들은 이들을 내집단으로 들이고 다른 남성, 여성은 손쉽게 타자화시킨다. (이런 거 보면 성별 자체는 중요하지도 않은 듯하기도 하다.) 특히 여성과 남성은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손쉽게 분리되기 때문에 더 서로를 외집단으로 여기기가 쉽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남중과 남고를 나왔고 내 주위의 친구들도 대부분 그렇다.(요즘은 중학생 때까지는 남녀 합반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등학교만 해도 남녀 공학이더라도 반을 성별로 분리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 여성뿐만이 아니라 핵가족화로 조부모와 소통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노인 혐오로 이어지기도 쉬운 환경이다. 특히 나이로 인한 서열 문화가 강력한 우리나라에선 나이로 인한 소통의 분리가 매우 쉽게 나타나며 이는 자기와 다른 나이대의 사람들을 혐오할 수 있는 손쉬운 환경으로 만들 수 있다. 심지어 학교에선 서로 다른 학년에 대한 편견도 매우 쉽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소통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코로나로 인해 대인 소통은 확연하게 줄어드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고 SNS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은 언뜻 보면 사회적인 소통을 활성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손쉽게 분리하도록 작동하기도 한다. SNS로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팔로우하고 연결되어 교류하는 경우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유튜브 채널 등이 그러하다. 특히 일부 인터넷 카페는 특정 성별 가입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이 카페의 가입 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다. 보통 문제 상황을 사전 예방하려는 의도로 생겨난 정책이니까.)
어쨌든 이렇게 되면 사회 내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고 사회 안전망은 무너질 수 있다. 이미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인 고독사와 청년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이미 이런 문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집단은 점점 좁아지고 있고 외집단에 대한 혐오나 무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린 배려나 관용이 그냥 인간이기에 으레 지켜야 하는 케케묵은(?)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어른들한테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사회적인 배려나 관용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물리적,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안전장치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내집단에 더 많은 나이대의 사람들과 더 많은 성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 더 많은 다양한 성별들, 더 많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흡수해야 한다. 이들과 서로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을 때, 다양한 사람들과 사랑을 할 때 우린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