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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을 4로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나(스포주의)

인종 차별 반대가 아니라 인종 차별을 이용한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

by 무니

글을 읽기 전 영화를 안 본 분들을 위한 매우 간단한 요약(생략이 많이 됐습니다.)


암에 걸린 엽문은 아들의 미국 유학을 알아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아들은 공부는 싫고 쿵푸를 하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반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문은 반대하며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선 추천서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차이나 타운의 만종화 사부를 찾아간다. 만종화 사부는 대신 쿵푸를 절대 미국인들에게 알려주지 말 것을 요구한다.(엽문의 제자 이소룡이 쿵푸를 알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 알려줘봐야 미국인들은 그걸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엽문은 쿵푸를 알려주는 것에 문제가 없다며 거절하고 결국 추천서를 받지 못한다. 그렇게 입학할 학교를 알아보던 중 한 학교에서 인종차별 공격을 당하던 만종화 사부의 딸을 구하게 된다.


한편 이소룡의 제자 중 동양인 미 해병대원이 있는데 미 해병대원은 미 해병대에 쿵푸를 알리고자 하지만 훈련 교관이면서 가라테 신봉자인 바턴 게디즈는 쿵푸를 깔보며 거절하고 미 해병대원은 더 높은 상사를 찾아가 받아들여줄 것을 요구하고 그 지휘관은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바턴 게디즈는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차이나타운을 공격한다. 그리고 불법 이민을 도왔다는 핑계로 붙잡힌 만종화 사부와 대결해서 만종화 사부를 무릎꿇린다.


엽문은 이에 바턴 게디즈를 찾아가 대결을 하게 되고, 바턴 게디즈를 패배시킨다. 그리고 아들의 쿵푸하고자 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아들에게 쿵푸를 전달하고 죽음을 맞는다.



엽문이라는 작품이 유명한 줄 알았고, 한번 볼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리즈를 다 보긴 너무 지칠 것 같았고 가장 최신인 4를 한번 봐보기로 마음 먹었다. 시작부터 한 줄 평을 해보자면 "음...글쎄?"라는 점이었다.


난 사실 중국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특히 그 특유의 무술 액션 연출이 괜히 부끄럽달까. 이소룡의 그 비명에 가까운 기합은 나에겐 굳이 멋있다기보다 부끄럽다는 느낌을 많이 주었다.(정말 주관적인 인상입니다. 누군가에겐 멋있을지도?) 그래도 엽문은 유명하다해서 시작했지만 역시 그 특유의 무술 동작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술 액션신에서 합이라는 건 참 중요하지만 중국 무술 씬의 합은 나에게 인상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명한 영화니까 시간도 난 김에 본 것이다.


우선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이 영화에서 혹평을 준 사람들의 내용을 보면 "지나치게 중화사상을 미화했다"라는 내용이 많은데, 사실 이 부분은 사실임을 인정하면서도 크게 문제 삼고 싶진 않다. 원래 어느 나라나 이런 영화를 만들 땐 자국 미화를 종종 하니까. 캡틴 아메리카가 온 몸에 성조기를 두르고 있는 것이 다소 유치해보여도 굳이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지 않듯이, 중국 영화에서 중국 미화하는 부분이야 다 감안하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날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점은 너무 선과 악의 경계가 너무 유치하게 분명하다는 점이다. 원래 이런 영화가 다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요즘 영화는 악역도 악역 나름의 정의가 있거나 그런 행동을 하는 납득 가능한 이유를 억지로라도 끼워맞춘다. 그래야 이야기의 흐름이 보는 사람들에게 개연성을 부여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악역인 바튼 게디스(스콧 애드킨스)는 너무 노골적으로 아무 개연성없이 쿵푸를 무시하고 하대한다. 인종 차별을 주제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알겠는데 여기서 인종 차별 주의자들은 굉장히 노골적이다. 아무런 맥락도 흐름도 없이 분노에 찬 인종차별적 행동을 보여주는데 이게 너무 개연성도 없이 노골적이라 뭔가 당황스럽다. 그리고 인종차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인종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편을 갈라버리는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조연 백인들은 예외도 없이 하나같이 다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나마 엽문과 중국인에 동조하는 미국인은 흑인이다.(딱 한 명 쿵푸를 받아준 미국 지휘관 빼고. 이 사람은 영화에 3분 정도 나오려나.)


그래 뭐,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인종차별주의가 많이 일어났던 당시 미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것도 용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걸 넘어가도 가장 끝까지 납득이 어려운건 본인들은 가라테를 하면서 동양 무술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쿵푸 자체를 무시하면 모르겠는데 자꾸 동양의 무술은 위대한 미국에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며 동양 무술 전체를 까내린다. 가라테를 치켜세우며 이 대사를 하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가라테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며 저런 이야기를 하니 더욱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라테를 미국 무술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테고.


특히 콜린 프레이터가 가라테 복장을 하고 "Yellow Bitch들에게 real combat을 보여주겠다" 외치는 부분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 real combat이라는 것도 yellow bitch의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걸까. 자기가 입은 옷은 흰색이라 괜찮은걸까?(이 영화의 표현을 살린 것이지, 동양인을 yellow bitch라고 표현하고자 함은 아님을 밝힙니다.)

- 참고로 Whatcha에서는 Yellow bitch를 하룻강아지로 번역했는데 이건 인종차별적 메시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동양인(여기서 일본은 동양으로 안 치는가 싶다.), 흑인과 미국 백인과 일본 무술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강하게 드러난다. 단 한 명의 중국인 악역이 없고 단 한 명의 백인 선역이 없는 이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영화에서 오히려 다른 나라의 문화와 인종을 분노에 찬 인종차별주의자로 까내리는듯한 역설적인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엽문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미국 사회와 동양 사회의 화합을 추구하는 듯한 좀 더 정의로운 메시지를 던지고자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결국 화해에 이르렀다는 느낌도 없고 그냥 가라테 백인 유단자를 때려눕히는 걸로 갈등을 마무리짓는다. 마지막 자막으로 미국이 결국 무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화합이 이루어진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이겼다"라는 말을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견자단이라는 배우의 매력은 확실히 알았다. 내 취향은 아니더라도 그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액션 영화 팬들에게 인상을 줄만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띄워주려고 상대를 너무 무식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로만 노골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오히려 엽문이라는 캐릭터를 어정쩡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추가로, 인종차별 문제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버리는 바람에 인종차별 문제를 더 사소하게 취급한다는 느낌을 주어 영화의 주제마저 약해진다. 인종차별 문제는 마치 시스템처럼 자리잡아 뿌리뽑기 어려운 문제다. 인종차별은 타 집단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되고 그것이 사회 시스템 속에서 관습적으로 자리잡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악인만 인종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차별주의자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이 영화에서처럼 무식하게 인종차별적 언행과 행동을 하는 몇몇 악인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 악인들을 몇명 때려잡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엽문이 말했던 것처럼 이 무술을 통해 백인 사회와 다가가고 서로 같은 인간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모습이라도 보였으면 조금 유치하더라도 주제는 조금 살았을지도 모르겠다.(처음에 엽문과 만종화 사부의 대화를 볼 때 결말이 이렇게 날 거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으니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마저 중국 무술의 강력함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무리는 오히려 아들과의 세대간의 화합이 이뤄지는 것으로 끝맺는다. 만종화 사부도 딸과 세대 갈등을 겪는데, 세대 갈등 문제를 인종 갈등이랑 같이 전달하고자 하다보니 주제가 더 산으로 간다. 차라리 세대간 갈등보다 인종 갈등에 더 집중하는 것이 영화의 주제를 더 살렸을 것이다.


즉, 엽문을 띄워주기 위해 악역을 너무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어버렸고 어떤 사회적 맥락이나 흐름도 영화에 없다보니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마저 단순하게 보이며,유치하게 화해로 나아가는 연출마저 없으니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세대 갈등은 이 문제를 더 키운다.), 견자단이라는 배우의 매력만 남은 영화처럼 보인다.


엽문 1은 호평이 많으니 시간이 나면 엽문 1으로 한번 다시 도전해봐야겠다.


*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평으로, 전문적으로 영화를 평가하시는 분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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