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모든 것 시리즈 A: 「알쓸설탕」(알아두면 쓸모 있는 설탕 지식)
마트에서 설탕을 고르는 순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흑설탕이 백설탕보다는 낫겠지."
색이 진하면 뭔가 더 자연적이고 영양이 풍부할 것 같은 느낌. 가격도 더 비싸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정말 그럴까?
먼저 제조 과정부터 보자. 의외의 사실이 있다. 설탕 제조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것은 백설탕이다. 사탕수수에서 얻은 원당을 정제하면 순도 99.9% 이상의 백설탕이 나온다. 흑설탕은 그 다음 단계다. 백설탕에 열을 가해 갈변시키면 황설탕이 되고, 여기에 당밀(사탕수수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시럽)이나 캐러멜을 첨가하면 흑설탕이 된다.
즉, 한국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흑설탕은 **"정제를 덜 한 설탕"이 아니라 "정제한 백설탕에 공정을 더 거친 설탕"**이다. 순서를 다시 적으면 이렇다.
사탕수수 → 원당 → 정제 → 백설탕 → 가열/당밀 첨가 → 흑설탕
흑설탕이 백설탕보다 비싼 이유는 건강에 더 좋아서가 아니라, 가공 과정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이걸 모르면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공장 흑설탕"과 "비정제 갈색설탕"은 전혀 다른 물건이다.
공장 흑설탕은 위에서 말한 대로, 백설탕을 만든 뒤 색과 풍미를 다시 입힌 것이다. 반면에 비정제 갈색설탕은 정제 과정 자체를 최소화한 것이다. 사탕수수 즙을 짜서 불순물만 걸러낸 뒤, 당밀을 분리하지 않고 그대로 농축하여 결정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머스코바도(muscovado), 라파두라(rapadura), 파넬라(panela), 그리고 인도의 구르(jaggery)다.
이 차이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공장 흑설탕은 "하얀 쌀밥에 현미 색소를 뿌린 것"이고, 비정제 갈색설탕은 "도정을 최소화한 현미 자체"다. 같은 갈색이지만 만드는 방향이 정반대다.
비정제당은 당밀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네랄 함량이 공장 흑설탕보다 확실히 높다. 머스코바도의 경우 칼륨, 칼슘, 마그네슘, 철분 등이 공장 흑설탕의 수 배에 달한다. 풍미도 다르다. 깊은 캐러멜 향, 토피 같은 복합적인 맛이 난다. 요리에 쓰면 백설탕으로는 낼 수 없는 깊이가 생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비정제당이든 정제당이든, 설탕은 설탕이다. 칼로리는 거의 같다(100그램당 약 380~400킬로칼로리). 비정제당의 미네랄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해도, 의미 있는 영양을 섭취하려면 설탕을 수백 그램 먹어야 하는데, 그건 당류 과다 섭취로 건강이 더 나빠지는 길이다.
"설탕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원칙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요리에 설탕을 아예 쓰지 않기는 어렵고, 커피에 한 스푼을 넣는 습관을 하루아침에 끊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같은 한 스푼이라도 무엇을 넣느냐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장에서 정제한 뒤 다시 색을 입힌 흑설탕 대신, 정제를 최소화한 비정제당을 선택하는 것. 칼로리나 당류 총량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맛의 복합성이다. 비정제당은 당밀 속 수백 가지 미량 성분 덕분에 맛이 복잡하다. 같은 양을 넣어도 풍미의 만족감이 높아, 장기적으로 사용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A-4편에서 다뤘듯, 미각은 재보정된다. 복합적인 단맛에 익숙해지면 단순한 단맛이 밋밋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둘째, 공급망의 윤리다. 그리고 이 부분이 사실 더 중요할 수 있다.
세계 설탕 시장은 거대 자본이 지배한다. 브라질, 인도, 태국 등의 대형 제당 기업들이 수백만 톤 단위로 원당을 생산하고, 글로벌 곡물 메이저(카길, 루이드레퓌스 등)가 유통을 장악한다. 이 시스템에서 소규모 사탕수수 농가는 가격 결정권이 없다. 국제 원당 가격이 떨어지면 농가 소득은 곤두박질치고, 올라도 중간 유통 마진에 흡수된다.
이 거대한 산업의 틈새에서, 작지만 다른 방식으로 설탕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필리핀의 소규모 사탕수수 농가들은 전통 방식 그대로 사탕수수 즙을 가마솥에 끓여 머스코바도를 만든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의 산간 마을에서는 파넬라를 만드는 트라피체(trapiche, 전통 압착기)가 수백 년째 돌아가고 있다.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는 구르를 만드는 가내수공업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대형 제당 공장과 경쟁할 수 없다. 규모도, 가격도, 유통망도 비교가 안 된다.
이 생산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공정무역(Fair Trade)**과 유기농 인증 시장이다. 국제공정무역기구(Fairtrade International)는 소규모 사탕수수 농민 조직에 설탕 1톤당 60달러(유기농은 80달러)의 공정무역 장려금(프리미엄)을 보장한다. 이 프리미엄은 농민 조직이 스스로 용도를 결정하며, 학교 건설, 관개 시설, 의료 지원 등에 쓰인다(Fairtrade International, 「설탕」).
유기농 비정제당 시장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유기농 사탕수수 설탕 시장은 밀레니얼·Z세대의 윤리적 소비 트렌드에 힘입어 꾸준히 확대 중이다. 한국에서도 아이쿱 생협, 아름다운가게 등을 통해 공정무역 설탕과 비정제당을 구할 수 있다. 물론 전체 설탕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커피 시장에서 공정무역이 작은 틈새에서 시작해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설탕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마트의 흑설탕은 백설탕의 변장이다. "건강하니까 비싼 것"이 아니라 "공정이 추가돼서 비싼 것"이다. 건강 차이를 기대하고 흑설탕을 고르는 것은 착각이다.
진짜 갈색설탕 — 머스코바도, 라파두라, 파넬라 — 은 정제를 최소화한 별개의 물건이다. 맛의 깊이가 다르고, 생산 방식이 다르고,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르다. 칼로리는 비슷하지만, 한 스푼의 의미가 다르다.
설탕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한 스푼을 쓸 수밖에 없다면, 그 한 스푼이 어디서 왔는지를 한 번쯤 뒤집어 보시라. 색깔이 아니라 이력(履歷)이 그 설탕의 진짜 가치를 말해준다.
하이닥, 「흑설탕 vs 백설탕, 어떤 게 몸에 더 좋을까?」, 2024.8.10
이데일리, 「설탕 色의 비밀…황설탕·흑설탕은 건강할까」, 2016.4.11
Fairtrade International, 「설탕(Sugar)」 — 공정무역 설탕 기준 및 프리미엄 구조
다음 편 ― 「설탕이 약이었던 시절」: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후추보다 비싼 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