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없는 세계 ⑨
2024년 가을, 여수 국가산업단지 인근에 낯선 시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NCC 공장들 사이에 자리 잡은 이 시설은 기존 석유화학 공장과 다른 원료를 받아들인다. 정유소에서 온 나프타가 아니라, 분리수거장에서 걸러낸 폐플라스틱이다.
시설 안에서 잘게 파쇄된 폐플라스틱이 반응기로 들어간다. 산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400~500℃의 열에 노출되면, 긴 고분자 사슬이 다시 짧은 탄화수소 분자로 쪼개진다. 이것을 '열분해(pyrolysis)'라 한다. 생성된 액체가 '열분해유'다. 성분이 나프타와 유사하여, 정제 후 기존 NCC에 그대로 투입할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설비를 처음부터 짓지 않아도 원료만 바꾸면 된다. 수십조 원 규모의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원료를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 열분해의 가장 현실적인 장점이다.
쓰레기가 다시 원료가 되는 것이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구조물을 개별 블록으로 분해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조립하는 것과 같다. 플라스틱이 석유에서 시작해 제품이 되고, 사용 후 쓰레기가 된 것을 다시 원료로 되돌리면, 석유 의존도를 줄이면서 동시에 폐기물 문제도 완화할 수 있다.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라는 개념이 화학산업에 적용된 가장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이 화학적 재활용이다. 생산→사용→폐기의 일방통행 구조를 폐기→원료화→생산의 순환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폐플라스틱을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물리적 재활용(세척·분쇄·재성형), 화학적 재활용(분자 수준으로 분해·복원), 에너지 회수(소각·열 이용).
물리적 재활용은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폐플라스틱을 세척하고 잘게 부수어 녹인 뒤 다시 성형한다. 그러나 물리적 재활용에는 '다운사이클링'이라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재활용을 거칠 때마다 고분자 사슬이 손상되어 물성이 떨어진다. 음료 페트병이 재활용되면 다시 음료 페트병이 아니라 섬유나 충전재 같은 낮은 등급의 제품이 된다. 같은 품질로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다.
순환 경제의 관점에서 물리적 재활용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 한계 때문에 모든 폐플라스틱을 물리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이 섞인 혼합 폐기물, 음식물로 오염된 포장재, 다층 복합 포장(과자 봉지처럼 여러 소재가 겹쳐진 것)은 물리적 재활용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국내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은 2021년 약 1,193만 톤으로, 코로나19 이전 대비 약 50% 증가했다(그린피스·충남대 장용철 교수 연구팀, 2023). 배달 포장재를 포함한 '기타 폐합성수지류'는 2년 만에 80.6%나 급증했다. 이 증가분의 상당 부분이 물리적 재활용이 어려운 혼합·오염 폐플라스틱이다.
화학적 재활용은 이 '물리적 재활용 한계 폐플라스틱'을 처리하는 기술이다. 분자 수준에서 원료로 복원하므로 이론적으로 품질 저하 없이 무한히 재활용할 수 있다. 기존 NCC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더 큰 문제는 '분리수거'와 '재활용'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분리수거 참여율은 세계적으로 높지만, 분리수거된 폐플라스틱 가운데 실제로 물질 재활용되는 비율은 그보다 낮다. EU 기준 한국의 실질 재활용률은 약 27%로 추정된다(그린피스·충남대, 2023). 나머지는 소각되거나 매립되거나, 수출된다. 이 격차를 줄이려면 물리적 재활용의 확대와 함께 화학적 재활용이 보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론만큼 단순하지 않다.
첫째, 원료 품질이다. 열분해에 적합한 것은 PE와 PP 같은 올레핀 계열이다. PVC가 섞이면 염소가 발생하여 장치를 부식시킨다. 한국의 분리수거 체계는 참여율이 높지만, 소재별 정밀 분류는 대부분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어 품질 확보가 어렵다.
둘째, 에너지 소비다. 열분해 자체에 상당한 열에너지가 필요하며, 현재 대부분 화석연료를 태워 열을 공급한다. 열분해의 탄소 발자국에 대해서는 아직 학술적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일부 연구는 소각보다 탄소 배출을 줄인다고 보고하지만, 원료 수집·운송·전처리까지 포함한 전 과정(lifecycle)을 따지면 이점이 크게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열분해가 진정한 탈탄소 기술이 되려면, 열분해 공정의 에너지원 자체도 재생에너지로 전환되어야 한다.
셋째, 수율이다. 투입한 폐플라스틱 대비 유용한 열분해유의 비율은 50~80% 범위로, 공정 조건과 원료 품질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넷째, 경제성이다. 열분해유 생산 비용은 톤당 500~900달러로 추정된다. 폐플라스틱 수집·선별·전처리 비용, 열분해 설비 건설·운영 비용, 열분해유 정제 비용을 합친 수치다. 호르무즈 사태 이전 나프타는 톤당 550~600달러였으므로 격차가 있었다. 그러나 사태 이후 나프타가 톤당 800달러 이상으로 치솟으면서 가격 격차가 좁혀지거나 일부 경우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유가가 높고 나프타 공급이 불안정한 환경이 지속되면, 화학적 재활용은 단순한 '환경적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을 갖는 대안이 된다. 호르무즈 같은 공급 충격이 발생하면 가격에 관계없이 대안 원료 확보 자체가 산업 생존의 문제가 된다.
탄소 규제도 경제성을 바꾼다. EU의 CBAM이 본격 시행되면, 순환 원료(열분해유)로 만든 제품은 탄소 비용 면에서 우위를 가진다. 유럽 시장에서 재활용 원료 기반 제품의 프리미엄이 이미 형성되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이 ISCC PLUS(국제 지속가능성·탄소 인증) 획득을 추진하는 것도 이 맥락이다.
열분해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가스화(gasification)는 폐플라스틱을 더 높은 온도(700~1,500℃)에서 제한된 산소와 함께 반응시켜 합성가스(일산화탄소+수소 혼합물)로 전환하는 기술이다. 합성가스에서 다시 메탄올이나 에탄올 등의 화학물질을 만들 수 있다. 열분해보다 폭넓은 종류의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어, PVC가 섞이거나 심하게 오염된 혼합 폐기물도 투입 가능하다. 다만 설비 비용이 크고, 합성가스에서 원하는 화학물질로 전환하는 추가 공정이 필요하여 전체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해중합(depolymerization)은 특정 플라스틱을 선택적으로 분해하여 원래의 단량체로 되돌리는 기술이다. PET를 해중합하면 테레프탈산(TPA)과 에틸렌글리콜(EG)로 분리되어, 버진 원료와 동등한 품질의 PET를 다시 만들 수 있다. 열분해보다 품질 면에서 우수하지만, 현재로서는 PET, 나일론 등 일부 플라스틱에만 적용 가능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효소 기반 분해다. 프랑스 카르비오스(Carbios)는 PET를 분해하는 효소를 개량하여, 상온에 가까운 조건에서 단량체로 되돌리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2024년 프랑스에 세계 최초의 상용 규모 효소 기반 PET 재활용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에너지 소비가 열분해보다 크게 줄어들 수 있지만, 경제성과 규모 확대에 대한 검증이 아직 필요하다.
다음 회에서는 이 기술이 한국에서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살펴본다. 열분해 처리 비중 0.1%, 과연 10%까지 갈 수 있을까.
환경부, "폐플라스틱 열분해 활성화 방안", 2021
그린피스·충남대, "플라스틱 대한민국 2.0", 2023
European Bioplastics, 순환경제 행동계획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