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없는 세계 ⑥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사망했고, 이란은 보복 조치로 호르무즈 해협의 해상 교통을 사실상 차단했다. 호르무즈 해협 통행량이 95% 이상 감소하면서, 페르시아만 일대의 원유와 석유 제품 수출이 거의 중단되었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65달러에서 126달러까지 폭등했다.
앞의 세 가지 위기가 중장기적 구조 변화라면, 네 번째 위기는 갑자기 닥쳤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69%가 중동에서 온다. 그 가운데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의 중동 의존도는 54%에 달한다(한국석유공사). 호르무즈가 막히자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원료 공급선이 단번에 절반 가까이 끊겼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여천NCC는 나프타 도입 차질로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다. 국내 주요 NCC의 가동률은 60% 이하로 급락했다. 나프타 가격은 한 달 만에 50% 넘게 폭등했다.
석유화학 기업들만 타격을 받은 것이 아니다. NCC 가동률이 떨어지자 에틸렌, 프로필렌 공급이 줄고, 이를 원료로 쓰는 후방 공장들 — PE, PP, PVC, ABS, 합성고무 — 도 연쇄적으로 감산에 들어갔다. 포장재 업체는 원자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고, 자동차 부품사들은 수지 수급을 걱정했으며, 건자재 회사들은 PVC 파이프 생산 차질을 우려했다. 석유화학이 '산업의 산업'이라는 것을, 이 사태가 생생하게 증명해준 것이다.
일반 소비자에게도 영향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용기와 포장재 가격이 오르고, 자동차·가전의 부품 수급 차질로 납기가 지연될 수 있으며, 원료 가격 상승이 최종 소비재 가격에 전가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먼 바다의 사건이 한국인의 일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호르무즈 사태가 드러낸 또 하나의 취약성은 나프타 비축 체계의 부실이다.
한국은 원유에 대해서는 IEA 권고에 따라 약 90일분 이상의 전략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나프타에 대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국가 비축 체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석유화학 기업들의 자체 나프타 재고는 통상 1~2주분에 불과하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어 중동산 나프타 공급이 완전히 끊기면, 기업들은 보유 재고만으로 1~2주 정도 공장을 돌릴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 원유 비축을 나프타로 전환할 수는 있지만, 원유에서 나프타가 차지하는 비율은 10~15% 내외에 불과하다. 비축유 방출만으로 석유화학이 필요로 하는 규모의 나프타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원유 비축은 있지만 나프타 비축은 없다. 이 구조적 공백은 한국의 에너지 안보 체계가 석유를 주로 '연료'로 바라보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석유가 '원료'로서 갖는 전략적 중요성은 간과되어 온 것이다. 정부가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한시 지정한 것은 이 공백을 인식한 긴급 대응이었다.
같은 충격 앞에서 각국의 대응은 달랐다. 그 차이는 각국 석유화학산업의 원료 구조와 사전 대비 수준을 반영한다.
중국은 이란 전쟁 직후 러시아산 원유와 나프타 수입을 빠르게 확대했다. 이미 러시아와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있었고, 파이프라인 인프라도 갖추고 있어 호르무즈 봉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다. 석탄 기반 화학(CTO) 능력도 있어 대안 원료로의 전환이 가능한 구조였다.
일본은 외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이란 측과 통항 교섭을 시도하면서, 자국 정유사들에게 인도·동남아시아산 원유 확보를 독려했다. 일본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왔고, 2010년대에 이미 NCC 통합·감축을 경험하며 산업을 슬림화한 바 있어 상대적으로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서 자국 내 생산을 증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미국 석유화학의 주요 원료는 나프타가 아니라 에탄이며, 에탄은 미국 내 셰일가스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므로 중동 공급 차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한국은 이들에 비해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다. 자체 석유 생산이 거의 없고, 나프타 대체 원료 기반의 화학 인프라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수입선 다변화와 비축 방출 외에는 즉각적 대응 수단이 부족했다.
이 네 가지 위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를 강화하고 증폭시키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의 공급과잉이 한국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킨다. 수익성이 악화된 상태에서 탄소 규제 비용까지 더해지면, 기업들은 설비 투자와 기술 전환에 쓸 여력이 줄어든다. 기술 전환이 지연되면 나프타 의존도는 높은 상태로 유지되고, 이것이 공급망 취약성을 고착시킨다. 그리고 호르무즈 같은 공급 충격이 발생하면 나프타 가격이 폭등하여 원가 부담이 가중되고, 이미 수익성이 낮아진 기업들의 경영 위기는 더욱 심화된다. 위기의 악순환이다.
반대로, 유가가 급등하면 대안 기술의 상대적 경제성은 개선된다. 나프타 가격이 50% 오르면, 열분해유(폐플라스틱에서 뽑은 나프타 대체 원료)나 e-나프타(CO₂와 그린수소로 만든 합성 나프타)의 가격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호르무즈 사태는 역설적으로 탈석유 전환의 경제적 논거를 강화한 측면이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이 직면한 위기는 '경기순환'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전환'의 문제다. 중국의 자급률 상승은 돌이킬 수 없고, 탄소 규제는 강화될 수밖에 없으며, 호르무즈 같은 지정학적 공급 충격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환율이 정상화되면서 수출 경쟁력이 회복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경기 회복과 함께 수요도 반등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에는 '자연 회복'의 경로가 보이지 않는다.
네 가지 위기에 동시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나프타에 대한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낮추고, 원료 다변화와 공정 혁신을 통해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대안 기술을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탈석유'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안이 바이오 플라스틱이다. 석유 대신 식물에서 플라스틱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직관적으로 매력적인 이 아이디어에는, 심각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착한 플라스틱'이라 불리는 바이오 플라스틱의 실체를 살펴본다. 옥수수로 만든 플라스틱, 정말 '착한' 걸까.
IEA, "Oil Market Report", 2026년 3월
한국석유공사, 중동산 원유·나프타 도입 비중 통계, 2024~2026
산업통상자원부, 나프타 경제안보품목 지정 관련 발표, 2026.3
넥스트(NEXT),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넷제로 로드맵",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