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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지 Oct 09. 2021

<조용한 희망> 탈출구는 있다

학대와 빈곤을 신중하게 다루는 법

* 스포일러 경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조용한 희망>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조용한 희망>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의 두 가지 기둥은 학대와 빈곤이다. 이른 결혼으로 일하고 공부할 기회를 포기한 알렉산드라(마가렛 퀄리, 이하 알렉스)는 두 살짜리 아이와 함께 야반도주를 한다. 바텐더로 야간 근무를 하는 그의 배우자 션(닉 로빈슨)이 술을 마시고 집(RV)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물건을 던지고 부수기 때문이다. 당장 머물 곳이 없는 알렉스는 일부나마 집세 보조를 받기 위해 지역 복지관에 도움을 청하는데, 그러려면 직장 정보와 피해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알렉스에게는 둘 다 없다. 출산과 육아로 집에 고립되어 경력을 쌓지 못했고, 자신이 엄연한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는 건 알지만 맞지는 않았으니까 신고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는 경찰을 찾는 대신 집을 나왔다. 사정을 이해한 사회복지사는 알렉스를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무료 쉼터를 알려주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신체 피해를 입은 이들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걱정한다. 션이 난동을 피웠을 때 경찰을 부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알렉스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엔 구성원의 삶을 지원하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가 있다. 그건 우리가 고루 나눠서 써야 하는 서비스고, 더 많이 가져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이런 알렉스의 반응은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인간에게는 악조건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부터 떠올리는 숭고한 마음이 있다. 알렉스는 대체로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상대와 교감하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반응은 더없이 슬픈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상을 안다. 얼굴 어딘가가 다치고 마음이 무너진 여성. 알렉스는 그런 여성과 살았다. 그의 엄마 폴라(앤디 맥도웰)는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마음의 병을 얻고, 반면 아빠 행크(빌리 버크)는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새 가정을 꾸리고는 종교에 충실한 삶을 산다. 이 명백한 대비는 각각 폭력의 역학을 대변한다. 가해자의 삶은 시간이 한참 흘러 업그레이드되었다. 피해자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그 이미지가 뉴스와 드라마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시각적으로 형태가 누적되어 ‘완성’된다는 문제까지 있다. 알렉스가 생각하듯 (과거의 엄마처럼) 상처투성이 여성, 혹은 (지금의 엄마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성이어야 가정 폭력의 진정한 피해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폭력은 그 자체로 나쁘지만 드러나는 상태로만 피해의 경중을 따져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타인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자기 검열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 나쁘다.      





알렉스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성정이 그렇기도 하지만 알렉스의 삶을 따라가면 하루가 너무 빡빡해서 온당한 감정 표현조차도 낭비인 것만 같다. 탈출로, 제도의 지원으로 폭력적인 배우자와 물리적 거리를 확보했다고는 해도, ‘의’는 차치하더라도 두 살짜리 아이 매디에게 절실한 ‘식’과 ‘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운전 말고는 별다른 기술이 없어 보이는 25세 싱글맘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채용률이 높다는 회사에 들어가는데, 청소부 알선 업체다. 여기서 알렉스가 얻게 된 직업이 곧 작품의 원제목이다. 알렉스는 넷플릭스 한국어 자막팀이 ‘파출부’로 번역한, 말하자면 청소 도우미인 ‘메이드maid’가 된다. 근무 조건은 형편없다. 청소 도구와 세정제는 직접 사야 한다. 진공청소기는 업체에서 빌려 쓰고 반납해야 하니 일이 끝나도 집으로 바로 못 간다. 시간에 맞춰 의뢰인의 집에 도착했어도 문이 잠겨 있다면 그날의 일당도, 버린 시간과 기름 값도 보장받지 못한다. 주 정부의 근무 시간제한으로 주 30시간 이상의 노동을 허용하지 않는데, 시급은 10달러다. 알렉스는 이렇게 버는 푼돈으로 아이를 먹이고 재워야 한다. 그리고 맡겨야 한다. 일터에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려면 또 돈이 든다. 주 정부가 지원하는 어린이집으로 가면 비용을 좀 줄일 수는 있는데, 그런 곳에선 직원이 갑자기 사라진다. 급하게 데려온 대체 인력은 아이들을 식별하지 못한다. 이런 곳에 아이를 계속 맡겨둘 수 있을까? 그런데 이를 직업의식 없는 노동자 개인의 문제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이것은 운영의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일터에 배당된 적은 예산과 무리하게 투입된 노동 인력의 문제일 확률이 높다. <조용한 희망>의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관심사는 이와 같은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나쁜 연쇄 작용이다. 아이가 한 사람의 손에 자라는 것은 바람직할 수 없다. 적절한 제도가 작동해야 하고 주변의 선의가 필요할 것인데, 알렉스를 둘러싼 제도와 인연은 죄다 고장 나 있다. 엄마 폴라는 치료를 거부하는 만성적인 조울증 환자다. 아버지 행크는 이제 와서 아이를 봐주고 싶어 하지만 그는 알렉스가 용서할 수 없는 어른이다. 직업적인 성공을 이룬 친구 네이트가 따뜻하게 손을 내밀지만, 알렉스는 그 마음이 고마워도 근본적으로 둘이 동등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안다. 친구의 선의마저도 빚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알렉스는 결국 자신이 떠나온 션에게 돌아간다. 술을 끊으려 노력한다 말하지만 다시 술에 의존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전 남편에게로.   

  




작품이 막판에 이르러 알렉스에게 주는 ‘조용한 희망’은 이주다. 근거지에서 아홉 시간 떨어진 새로운 지역으로 가는 것이다. 배우자와의 악연이 공정한 법 집행을 통해 정리되고, 4년간 유예 상태였던 대학 입학이 허가된 덕분이다. 거긴 주거비 보조 정책과 탁아 시설이 있는 곳이다. 작품은 이렇게 막을 내리지만, 사실 우리는 그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아이는 이제 막 세 살이 되었다. 알렉스는 최소 4년간 공부를 해야 한다. 장학금을 받긴 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할 것이다. 졸업하면 취업을 고려해야 한다. 이 이상의 고비는 없기를 진정으로 바랄 만큼 알렉스의 사정은 어지럽지만, 작품이 전하는 질문과 답은 대단히 단순하다. 왜 가난한 사람은 나쁜 선택을 할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학대의 피해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부모와 함께 살아왔을 확률이 높고, 성인이 되어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부모와 같은 생계 스트레스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 그런 가난한 사람은 비슷하게 가난한 사람과 사랑에 빠질 확률이 높고, 이 사랑 사이에 폭력이 개입될 확률 또한 높다. 이것은 알렉스와 션이 두루 경험한 것이다. 작품은 둘 사이의 피해와 가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면서도 이 폭력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선택지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 사람을 궁지로 몰아놓는다 해도, 그러나 우리는 망가지지 않을 수 있다. 가난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될지언정 학대의 고리는 우리가 끊을 수 있다. 개인이 구조를 돌파하는 게 불가능해도 올바른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난과 학대라는 비참한 현실을 지나치게 상세하게 펼쳐놓은 이 작품이 갖는 책임의식이자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그토록 알렉스를 괴롭혔던 션은 마지막에 와서야 변한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육권을 포기한다. 알렉스는 한결같다. 그에게 아이란 어떤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선 가치다. 그라고 왜 아이를 내려놓고 싶지 않을까. 그런다면 일도 공부도 사랑도 조금 더 순조로울 수 있을 것인데. 하지만 알렉스에게 그런 기색은 없다. 성인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이를 방치하는 이야기는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맞다. 그래서는 안 된다. <조용한 희망>은 결국 진정한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살면서 지키려 애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작은 희망이 있다. 고상하지 않은 삶이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단단한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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