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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지 Jul 31. 2021

<퀸스 갬빗> 그냥 선수야, 여자 선수가 아니라

성별 고정관념

※ 스포일러 경고

<퀸스 갬빗>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어차피 픽션이니까     


시대극 대부분이 가부장제 사회를 당연시한다. 여성 캐릭터가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제약에 몰입한다. 정확한 과거 인식은 필요하지만, 그 시대엔 다 그랬다면서 여성을 괴롭히는 관행에 무감하고 싶지 않다는 딜레마가 마뜩잖아 극이 여성을 과거로 보낼 때마다 달가울 일이 거의 없다. 


1960년대 활약한 미국 여성 체스 선수의 일대기를 그린 <퀸스 갬빗>도 그럴 줄만 알았다. 시놉시스만 봐도 캐릭터가 겪을 고통이 훤히 그려지는데, 게다가 작품은 시작부터 부모를 지워버린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딸의 존재를 모르고, 알았어도 좋은 아버지가 됐을 것 같지 않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베스 눈앞에서 죽었다. 그건 사실 자살이었고, 어린 베스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자란 베스가 결국 여성 체스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를 편히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영웅에게 시련은 필요하다지만 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학습된 예측이야말로 이 작품이 트릭으로 쓴 긴장 요소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구태한 악조건을 설계했으되 그게 캐릭터에게 도식적인 분투의 요건이 되지는 않았다. 베스는 고아원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그 고아원은 규율에 엄격한 환경이었을지언정 아동 학대 현장은 아니었다. 한때 그 고아원에선 다수의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신경 안정제를 먹여 우릴 불안하게 했지만, 바뀐 주정부 보건 방침에 따라 투약을 중단했다. 베스는 거기서 친구 졸린과 체스 선생 샤이벌을 만나는데, 둘은 주인공의 미래를 결정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작품이 고아원 생활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거긴 천국도 지옥도 아니고 그냥 여러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 인연이 있고 이별도 있는 곳이다. 시간이 흘러 베스는 입양되어 고아원을 벗어나는데, 새아버지는 가족에 무심했고 새어머니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다시 우리를 불안하게 했지만 이런 양육자 개인의 문제가 아이에 대한 가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즉 베스는 신데렐라나 콩쥐 같은 ‘불쌍한’ 아이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성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비슷하다. 만연한 성차별을 외면하지는 않지만 그게 작품을 장악하지는 않는다. 베스가 좀 더 자라 체스에 눈을 뜨자 베스와 경기를 치른 여성은 딱 한 명이라는 걸 보여주고,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자 지역을 재패한 체스 신동의 이야기가 매체에 실리는데 그 논조는 예측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 여자라는 말만 하지 베스가 체스를 배운 과정과 부리는 기술을 상세하게 다뤄주지 않는데, 베스를 선수로 존중하지 않는 진부한 관점은 여기가 끝이다. 베스가 이 명백한 남초 사회의 유일한 여성이라는 사실에 흥분하는 호사가는 이제 없다. 베스는 체스 대회 우승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뒤부터 쇼핑의 자유가 없던 시절의 갈증을 해소하듯 화려한 옷을 많이 산다. 작품을 보는 우리만 그 화려한 패션쇼에 압도되지 베스의 지인과 거의 대부분 ‘너드’로 그려지는 경쟁자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베스의 성별은 다른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꾸밈이나 스타일로만 부각될 뿐 누군가 베스를 사랑한다면 그 감정은 베스의 외모나 스타일 이전에 실력과 카리스마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사회에서 오가는 뒷말은 베스가 체스로 권력을 얻은 뒤 치장이 아니라 약물, 담배, 술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큰 경기를 수차례 치르는 동안 단 한 번 패배한 베스에게 있어 위기나 한계 요인은 성별이 아닌 약물 중독이고, 이 문제는 시작이 고아원이었어도 약물로 망가진 고아원 동기는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초래한 것에 가깝다. 베스는 남자들과 경기를 하지만 결국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보기 전부터 베스를 작품이 얼마나 괴롭힐까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야만의 시대를 뚫고 튀어나온 특출한 여성은 존재 자체로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퀸스 갬빗>은 반대로 약자를 독무대에 세우고 그에 대한 통념 묘사를 대단히 절제해 긴장 요소로 역이용했는데, 이는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연출 철학을 잘 활용한 사례로 볼 만하다. “쾅하는 순간에는 공포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순간을 예상하는 동안에만 공포가 일어난다.” 또한 특출한 여성은 인권 의식을 토대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다. 편의상 여러 복잡한 맥락을 생략하고 사전적이고 원론적인 의미로 직행하자면 페미니즘은 여권주의의 다른 말인데, <퀸스 갬빗>은 이 이론을 설명하기 좋은 배경을 만들어놨지만 베스를 페미니즘 운동의 대변자로 그리지 않는다. 이미 원작에서부터 거짓 플롯을 택했다. 작품의 원작인 월터 테비스의 소설은 1983년 나왔고 작중에서 베스는 1960년대에 활약하는데, 사실 국제 체스 경기에서 여성 선수가 등장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베스의 성장 과정과 성취 일대기는 오히려 실존 남성과 가깝다. 그는 1970년대 활약한 미국의 체스 영웅 바비 피셔다. 베스가 고아라면, 피셔는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없었고 어머니는 노숙자였다. 베스와 마찬가지로 피셔도 체스 신동으로 자라 체스 강국 러시아와 붙을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의 인재로 기대되다가 러시아 선수에게 패하고 울었다. 성인이 된 뒤 디자이너 슈트를 즐겨 입을 만큼 패션에 민감했다는 것도, 기독교 단체가 포교 목적을 가지고 국제 경기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것도 둘의 공통점이다. 경기 스타일도 같다. 둘 다 오프닝 작전으로 공격적인 시실리안 디펜스를 선호했다. 베스가 첫 스승 샤이벌 씨에게 받은 책 『모던 체스 오프닝스』의 공동 저자는 피셔의 초기 멘토다. <퀸스 갬빗>은 이렇게 티 나게 베스를 피셔와 동일시하지만, 실존 인물의 불필요한 사고방식까지 가져오지는 않았다. 피셔는 여성과 비공식적인 경기를 할 때 몇 가지 핸디캡을 허용했다. 자신은 기물을 한 개 빼고 시작한다거나 상대의 기물은 이동 범위를 넓히는 식으로 상대에게 유리한 특수 규칙을 적용한 것이다. 이 이유는 체스와 젠더 문제를 설명할 때 지금까지 회자되는, 피셔가 1962년 남긴 유명한 언급으로 설명된다. “여자들은 다 약하다. 남자랑 달리 멍청하게 군다. 여자는 체스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초보자와 같아 남자와 겨룰 때 이기는 법이 없다They’re all weak, all women. They’re stupid compared to men. They shouldn’t play chess, you know. They’re like beginners. They lose every single game against a man.”


결국 베스는 여성을 선수로 여기지 않은 유명한 남성을 모델로 삼은 여성 캐릭터다. 개운치 않은 배경이지만, 나는 이것이 체스와 성차별이라는 낡은 현실 문제 파악 이상으로 픽션의 개방성을 살펴볼 만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감 있는 여성 영웅 캐릭터를 만들려면 마땅한 모델을 찾기 힘든 관계로 역사 속의 남자를 참고해야 하지만, 결국 픽션의 문법으로 고루한 성별 관념을 마음껏 엎어버리면서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해석한 <엘리멘트리>(2012~, 미국)도 좋은 예시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에서 셜록 홈스와 존 왓슨은 남성 콤비고 BBC 시리즈 <셜록>(2010~, 영국)도 이를 따른다. <엘리멘트리>도 홈즈는 남성인데, 왓슨은 존 왓슨이 아닌 조안 왓슨이며 여성(루시 류)이다. 그 유명한 원작의 뼈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남성만이 해왔던 역할을 언제든 여성이, 덤으로 백인이 아닌 인종이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시대와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원작을 재구성하려는 연출진에게 원작의 모든 세부 설정을 그대로 복제할 의무는 없다. 셜록 해석 사례에서 보듯 이야기의 기둥은 존중하되 시대가 요구하는 의식에 따라 무언가 탈락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퀸스 갬빗>도 37년 전에 나온 소설과 모든 부분이 같지 않다. 원작에는 꼬마 시절 만난 친구 졸린이 베스에게 자위를 시키는 장면이 있다. 베스는 이를 거부하지만 두려움을 느끼고, 이 경험은 베스가 첫 이성 섹스를 할 때 트라우마처럼 작용한다. 시리즈에선 어린 두 여성 사이의 성적 긴장을 완전히 걷어냈고, 좀 더 자란 베스에게 섹스는 처음부터 술보다 시시한 것으로 묘사된다. 졸린은 흑인이고 베스는 백인인데, 원작과 달리 시리즈에서 베스는 졸린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 않는다(이른바 ‘N-워드’). 시리즈에선 체스계를 성별이 아닌 실력으로 좌우되는 현장으로 그리고 있지만, 원작에서 베스는 남자 고등학생들의 적대감 속에서 경기를 치른다. 베스는 켄터키주 지역 체스 챔피언 해리 벨틱과 잠깐 사귀는데, 시리즈에선 벨틱이 베스에게 애정을 갈구하지만 원작에서 베스는 그가 자신을 때릴까 봐 걱정하는 대목이 있다. 이후 등장하는 미 챔피언 선수 베니 와츠는 베스가 러시아 선수와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 원작에서 홀로 전화로 베스를 돕는데, 시리즈에선 그를 포함해 그간 체스로 만난 모든 친구들이 상대의 패턴을 분석해 베스를 돕는다. 한 명의 남성에게 의존해 가장 중요한 경기를 치른 결말을 공동체의 협력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밖에도 원작에는 오늘날의 시야에서 부적절하게 보이는 대목이 꽤 많은데, 시리즈 제작진은 이를 재구성하면서 픽션의 자유와 해석의 윤리에 대해 꽤 숙고한 것 같다. 완벽한 고증만이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며, 남겨야 할 이야기 구조가 있지만 폐기해야 할 관점도 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다듬은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퀸스 갬빗>을 본 직후 이것이 픽션이라는 것에 조금은 실망했고 조금은 안도했다. 1960년대에 베스 같은 여성 체스 영웅이 실존했다면 현실의 체스판을 바꾼 훌륭한 롤 모델이 되었겠지만 그 시대는 특출한 여성에게 이 시리즈가 제작된 2020년보다 가혹했을 것이다. 빛나는 여성을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지만 동시에 이를 이루기까지 치른 고통을 묵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단히 고달픈 일이다. <퀸스 갬빗>은 그 피로를 이해하는 듯 불편한 리얼리티 대신 부분적인 편집을 택했다. 사실적인 고통만이 여성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여성의 이야기는 단일할 수 없다.      


여성 서사 논쟁     


한 통계 기업에 따르면 <퀸스 갬빗>은 2020년 넷플릭스 전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작품이 공개된 시기가 그해 10월이었고, 영화와 시리즈를 통틀어서 거둔 기록이니 엄청난 성과다. 이 순위표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10위권에 <퀸스 갬빗>처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더 크라운> <래치드>가 그렇고. 그밖에 순위에 속한 <엄브렐라 아카데미> <종이의 집> <검은 욕망> 등에도 비중이 크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는 있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여전히 더 많지만, 여성 캐릭터는 비중에 관계없이 일단 필요하기도 하거니와 여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전개도 유의미한 수요가 있다. 학문 관점에서 미국 영화와 TV 산업의 여성 과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의 한 미디어 연구소에 따르면 2019년 흥행 영화 가운데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40%였다(2018년 31%). 이 연구소는 ‘셀룰로이드 천장’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직장 내 보이지 않는 성차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개념인 유리 천장에서 유리를 필름의 소재인 셀룰로이드로 대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분을 양성평등의 절대 지표로 삼기는 어렵다. 셀룰로이드 업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성 인력의 비율이 남성과 점점 동등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이런 통계가 작품의 내용까지 판단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극의 성평등 수준을 측정하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데,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다.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여성 동료들과 만든 작품(Dykes to Watch Out For, 1985) 속 대사를 바탕으로 한다. ①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나오고, ② 이들이 서로 대화하며, ③ 대화의 소재로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퀸스 갬빗>을 여기에 적용하면 1화에서부터 귀여운 두 꼬마 베스와 졸린이 이성 섹스 얘기 말고도 가족 얘기도 하니까 이 테스트를 진작 통과했지만, 문제는 벡델 테스트가 비교적 낮은 허들이며 작품의 입장과 수준을 항상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하는 검증법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면 <트와일라잇>은 이 테스트를 무리 없이 통과해도 매우 자주적인 여성이 거의 혼자 이야기를 끌고 가는 <그래비티>는 1번 항목에서부터 탈락이다. 이름이 주어진 캐릭터가 둘 뿐이고 각각 남성과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할 대안적인 방법이 추가로 고안되었다. 그중 하나는 영화 <퍼시픽 림>(2013)의 여성 캐릭터를 사례로 삼은 ‘마코 모리 테스트Mako Mori Test’로, 벡델 테스트보다 엄격하며 구체적이다. ① 여성 캐릭터가 한 명 있고, ②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으며, ③ 이것이 남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지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규칙이다. 남성 주인공과 콤비를 이루는 역할인 데다 그보다 작품에 오래 머물지 않는 마코 모리를 과연 좋은 여성 캐릭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세부적인 논쟁이 따라오긴 했지만, 마코 모리 테스트는 <퍼시픽 림>처럼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도 독자적인 이야기가 있는 여성 캐릭터를 그린 경우를 설명해준다. 한계라면 이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지 대중적으로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2012년 미국 개봉 영화 기준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46편, 마코 모리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21편이다). 물론 <퀸스 갬빗>도 이 테스트를 가뿐하게 통과하는데, 오히려 이 작품에선 마코 모리 테스트를 남성 캐릭터에게 적용해볼 만하다. 그들의 쓰임새는 한정적이고 부수적이다. 저마다 고유의 이야기는 있을지언정 베스에 비해 깊지 않고 모두가 베스의 삶에서 보조적이거나 비교되는 역할을 수행한다. 흔치 않은 관점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가 트리거가 된 ‘퓨리오사 테스트Furiosa Test’는 그에 비해 간단하고 작품만큼이나 시원스럽다. 안티 페미니스트 집단이 화를 내면 통과다. 시리즈(1979~)의 올드팬들이 추억의 맥스와 재회하러 극장에 갔다가 맥스는 들러리에 불과하고 퓨리오사가 주인공이며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대대적인 ‘비추’ 및 불매 여론을 형성한 데서 비롯된 테스트다. 이 기준을 통과한 대표적인 작품은 <고스트 버스터즈>(2016)로, <매드 맥스>와 마찬가지로 꽤 오래 묵은 유명한 시리즈(1984~)를 해석하면서 남성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이 테스트의 한계이기도 하다. 통쾌한 구석은 있지만 원작에 대    한 이해가 있는 일부 관객의 기대를 엎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대상이 ‘리부트’된 작품으로 한정된다. 넷플릭스 히트작 <퀸스 갬빗>은 반대로 시리즈를 통해 원작이 뒤늦게 발견된 경우인데, 그와 무관하게 이 작품을 둘러싼 작은 반발을 한국 온라인에서 접하긴 했다. 자신한테 명작인 <퀸스 갬빗>을 페미니즘 텍스트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단단히 화를 내고 있었다. 이는 집단 행위가 아닌 데다 작품이 아닌 리뷰에 대한 반응이니 퓨리오사 테스트 프리 패스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떤 분야든 페미니즘이 묻었다고 날뛰는 일부 반응이 존재하는 한 이 테스트는 누가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리트머스가 된다.


극작가가 만든 테스트도 있는데 이는 동료 작가들의 타성을 비판한 뼈 있는 농담에 가깝다. <캡틴 마블> <어벤저스 어셈블> 등 여러 마블 코믹스의 스토리를 써온 켈리 수 디코닉Kelly Sue DeConnick은 2013년 ‘섹시한 램프 테스트Sexy Lamp Test’를 소개했다. 이를 발명한 작가의 냉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작품에서 여자 캐릭터를 지우고 그 역할을 섹시한 램프로 대체했을 때 이야기가 굴러간다면 해낸 것이다.” 누군가는 <어벤저스>와 <겨울 왕국>이 이를 통과했다고 말하지만, 블랙 위도우와 엘사가 섹시한 램프였다면 이야기가 어찌어찌 굴러간다 한들 박스오피스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테스트는 적용할 수 있는 작중 배경이 현실 바깥의 유니버스로 한정되며 그 배경에 인격을 가진 램프가 있어야 할 공상과학적 개연성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고, 본질적으로 그 뿌리가 업계를 향한 냉소이자 농담이니 과하게 진지해질 것도 없다. 통과하지 못할 때 의미가 있는 이 테스트를 <퀸스 갬빗>도 통과하지 못한다. 체스와 관련해 세상에 더 필요한 이야기는 중요한 대회에서 마법을 써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이기는 여성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불완전한 테스트들은 왜 나왔을까. 각각 미흡한 점이 있다고는 해도 극에서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따져보고 계량화하려는 부단한 실험의 일환이다. 달리 말하면 작품 속에서 여성이 섹시한 램프처럼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다. 램프는 기능이 있는 사물인데, 의인화될 수는 있다고 해도 섹시할 필요가 있는가? 그게 바로 많은 극에서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고, 벡델 테스트 이후 계속 업데이트되는 질문들은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한국에서 언제부턴가 ‘여성 서사’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쓰기 시작한 배경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나는 이 표현을 몇 해 전 소셜미디어에서 처음 접했는데, 아직 엄격하게 개념이 정립된 것 같지는 않다. 범위가 한정되지 않았으니 해석도 유연하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도, 페미니스트의 확고한 메시지를 실어 나르지 않아도,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내용이라도 여성 캐릭터가 이끄는 작품이면 너그러운 관점에서 여성 서사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위대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리지만, 참고한 모델이 남성이고 연출자도 남성이며 전반적으로 여권 이슈에 무감한 <퀸스 갬빗>은 ‘진정한’ 여성 서사로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논쟁은 과연 소모적일까. 모호한 기준으로나마 표현을 만들어 여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이야기를 찾고 그 깊이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지금 필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사라져야 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분간은 필요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대안적인 테스트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여성 서사의 범위가 불분명하다면 모든 여성 이야기에 각각의 위협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비중이 커도 마코 모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고, 반대로 블록버스터의 강한 여성상은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한 논평가에 따르면 “이들은 전통적인 남자 역할을 대체하거나 약간의 자율성만을 얻은 경우가 많으며, 페미니스트는 불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하고 반항하지 않는 여성을 부끄럽게 만든다.” <퀸스 갬빗>의 베스는 이 이분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수동적이지도 전통적이지도 않고,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을 쓰거나 불친절하게 반항하지 않으며, 시대적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한다. 이 여성 캐릭터가 신선했다면 남성보다 강해지기 위해 온갖 고생을 견뎌야 하는 당연한 여성 이야기에 대한 권태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 여자가 잘해?     


베스는 오직 경기를 위해서만 움직인다. 여가 시간엔 실전을 분석하고 쇼핑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커리어를 넘어 삶 전반이 흔들리자 쇼핑을 후회하고 술을 자제하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한다. 베스는 쇼핑과 술을 연애보다 훨씬 짜릿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그게 체스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이렇게 베스한테 중요한 체스를 작품은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한 분석가에 따르면 북미 유럽 영화나 시리즈에 체스가 많이 나오긴 해도 대개 스쳐 가는 장면이라서 성의 없는 기물 배치나 경기 운영으로 전문가를 거슬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퀸스 갬빗>은 공개 하루 만에 전 세계의 체스인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와 작품 속 경기를 신나서 분석해 제작진을 놀라게 했을 만큼 체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원작에서도 체스 컨설턴트로 참여한 미국의 체스 이론가 브루스 판돌피니는 시리즈를 위해 92가지 포지션을 고안했고, 체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로 캐스팅된 여러 배우를 촬영 기간 내내 교육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는 있다. 베스가 혼자 모의 게임을 할 때 잘못된 기물 이동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베스 역을 맡은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는 체스 룰을 몰랐다고 한다). 작품은 까다로운 전문가만 고려한 것이 아니다. 연출가 스콧 프랭크는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시간을 많이 쓴 부분은 체스에 무지한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을 만한 내러티브를 짜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양쪽 모두를 고려한 노력은 작품 바깥에서까지 통했다. 작품 공개 이후 3주 만에 미국에서 체스 세트 판매량 87%, 체스 북 판매량 603%가 급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나도 거기 조금은 기여한 사람이다. <퀸스 갬빗>을 본 뒤에 유튜브로 체스 두는 법을 익히고 체스 세트를 아마존에서 주문했고, 한 번 이겨봤더니 또 이기고 싶어져서 체스 이론과 전략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퀸스 갬빗’이 작품의 제목이기 전에 체스 오프닝 전술의 하나라는 것을 알고 게임에 임한다. 나는 체스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봤는데도 작품 속에서 경기 묘사가 가장 흥미로웠기에 이렇게 날뛴 것인데, 이렇게까지 안 해도 어떤 분야가 됐든 참여해봤거나 응원해봤다면 가장 재미있는 게임은 이기는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도 작품의 재미 요소다. 작중 경기는 긴장의 연속이지만 베스는 거의 항상 이긴다. 딱 한 번 졌지만 만회하기까지 작품은 별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 추락과 굴욕은 전개상 필요한 시련일 수 있어도 너저분하게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퀸스 갬빗>에도 위협 요소는 있다. 시대 분위기나 인간의 감정 묘사에 있어서는 보편적인 기준을 따르지만 여성의 사회적인 활동에 대한 제약은 의도적으로 걷어냈는데, 여성의 현실에 눈과 귀를 닫은 나이브한 연출이라고 비판할 여지가 있다. 체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선수인 유디트 폴가르Judit Polgar(1976~)가 보기에는 베스가 막판에 남성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 경기를 치르는 것도, 패배한 남성 선수가 베스에게 매너 있게 악수를 청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이 작품이 체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건 고마운 부분이다. 하지만 베스가 직면한 성차별은 내가 수십 년간 겪은 것에 비하면 일요일의 소풍이나 다름없다.” 폴가르가 활약한 세계는 이런 곳이다. 베스의 원형인 바비 피셔는 1962년 “여자는 체스를 못한다”면서 “집에나 있으라”라고 말했다. 1989년 개리 카스카로프는 “진짜 체스와 여자 체스가 있다”라고 말했다. 2015년 나이젤 쇼트는 남자가 여자보다 체스에 강한 것이 “타고 나는hardwired” 성질이라고 말했다. 프로 선수인 이들의 부적절한 발언은 논란도 되지만 권위도 갖는다.


말하자면 <퀸스 갬빗>은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이 없는 무균실 같은 세계를 그린다. 고정관념 위협이란 예를 들어 백인 주류 사회에서 유색인종의 학업 성취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면 이것은 속한 집단의 편견으로 인한 압력이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 밖에도 이 개념은 여성의 수학과 공학 성취도, 여성 기업가의 자질, 저소득층 아동의 학업 성취도, 노인의 신체 능력 등 사회적으로 기대치가 낮게 형성된 영역에서 발생하는 재능의 손실을 설명할 수 있는데, 작품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베스 같은 선수는 지금까지도 희박한 체스계도 마찬가지다. 체스닷컴이 제공하는 세계 체스 선수 랭킹 50위 정보에 따르면 2021년 3월 기준 여성 선수는 한 명도 없다(100위권에는 있다). 체스가 올림픽 종목이 아니라 멘털 스포츠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현상이고, 이런 기현상은 학계의 연구 대상이 된다. 


가장 일반적인 연구법은 최상위 남녀 선수별 기록을 토대로 성별 성취 격차를 측정하는 것이다. 신경과학자 웨이 지 마는 이에 대해 표본 집단의 크기가 다르기에, 즉 남자 선수가 훨씬 많기에 그들은 과잉 성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수학자 호세 카마초 콜라도스는 같은 데이터를 조금 더 정밀하게 분석해 헝가리와 인도에서는 유의미한 성별 격차가 나타나지 않음을 파악하고 체스계 성별 성취 격차의 원인을 표본 집단의 크기 차이가 아닌 사회적 요인에서 찾는다. 헝가리에는 15세에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선수 유디트 폴가르가 있고, 인도는 체스의 발상지이자 체스 연맹에 속한 여성 선수가 꽤 되는 나라다. 데이터는 의도한 결론을 위해 언제든 조작될 위험이 있고 수치만으로는 복잡한 사회문화 현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기에, 이에 대해 올바른 답을 찾고 여성의 체스 참여율을 높이려면 젠더 연구나 심리 연구를 포함하는 학제 간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두 학자의 주장은 2020년 10월 이후에 나왔다. <퀸스 갬빗>이 화제가 되면서 체스와 젠더에 대한 추가 논의가 이어지자 과학자이자 체스 애호가로서 관련 데이터를 읽고 대중의 눈높이에서 공유할 만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 또한 작품의 인기를 실감할 만한 반응인데, 사실 비슷한 연구는 10여 년 전에도 있었고 그 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한 연구가 세계 최상위 여성 체스 선수에게 고정관념 위협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 화제가 됐지만(2018), 같은 데이터를 재분석해 고정관념 위협이 분명히 작용한다고 본 연구가 이어서 나왔다(2020). 이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여성과 경기를 할 때보다 남성과 할 때 결과가 더 나쁜데, 비슷한 결론은 이전에도 도출되었다. 때때로 고정관념 위협은 역으로 작용한다. 15세에 여성 챔피언이 된 수잔 폴가르(유디트 폴가르의 언니)는 말했다. “남자들은 나한테 지면 항상 두통이 생긴다. 나는 건강한 남자를 이겨본 적이 없다.” 이렇듯 고정관념은 소수자의 참여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 집단 다수의 혐오 감정과 불필요한 자존심을 고려해줄 명분까지 준다. 


과장하자면 베스가 여성의 권리 쟁취라는 대의를 위해 체스판을 엎어버리고 광장에 나와 싸웠어도 여성 체스 영웅의 이야기는 성립한다. 그러나 <퀸스 갬빗>은 인간다워지기 위해 애쓰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과 거리를 두고 고정관념 위협이 없는 세계를 설계해 공정한 경쟁과 성취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이 여권을 부각할 때 환호하는 층이 있는가 하면 <퀸스 갬빗>을 페미니즘 텍스트로 읽는 이들에 대한 일부 반발처럼 그걸 지뢰로 여기는 측도 있을 것인데, 이 작품은 후자가 한번에 읽지 못하는 세련된 전략으로 양쪽 시장을 다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베스는 성별을 둘러싼 편견이 없을 때 여성이 일에 집중하고 더 나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진정한 이상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를 위해 우리는 불친절하게 반항하면서 강한 여성을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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