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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지 Jul 31. 2021

<스캄프랑스> 그 자식을 신고했어

불법 촬영, 이미지 기반의 성적 학대

※ 스포일러 경고

<스캄프랑스> <스팟리스> <죽음의 흔적> <데드윈드> <의혹의 맹점>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겪은 것     


마농은 파티에 종종 가지만 같이 어울리는 또래들과 달리 술을 안 마신다. 마농에게 꾸준히 들이대던 샤를은 마농과 첫 데이트를 하는 날, 학생답지 않게 비싼 차를 몰고 파리의 야경이 보이는 전망 좋은 옥상으로 데려가 핫초코를 타 준다. 그렇게 눈썰미를 과시하고는 연민을 바라는 듯 부만 있고 사랑은 없는 가족사를 늘어놓자 마농은 이게 다 바람둥이 특유의 진부한 수법이라고 면전에서 냉소하지만, 사실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한 데이트 안에 자신에 대한 진심이 녹아 있다는 걸 안다. 나아가 이런 낭만 무드에 휩쓸려 샤를에게 마음을 빼앗길까 봐 두려운 상태다. 둘 사이에 오가는 진실한 감정을 마농이 인정하기에는 상황이 좀 복잡하다. 이 데이트는 비밀 데이트이기 때문이다. 이건 샤를이 제안한 거래였다. “나하고 한 번 만나주면 다프네는 건드리지 않을게. 어때?”


그들이 다니는 파리의 한 고등학교엔 샤를과 잔 하급생이 많다. 첫 경험은 샤를과 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다프네도 그중 하나인데, 간절히 바란 끝에 그걸 이루긴 했다. ‘노콘’ 섹스를 하고 샤를이 연락을 끊은 데다 그날 뒤로 계속 속이 울렁거려 임신이 아닐까 한참 두려워했는데, 교내 보건 교사와 상담한 결과 영양실조이긴 했지만 그렇게 불안에 시달리고도 다프네는 샤를을 원망할 줄 모르고 여전히 그가 보낸 문자 속 이모티콘 하나에 일희일비한다. 마농은 그런 다프네와 급식을 먹고 파티에 가는 사이다. 친구가 곤경에 처할 때면 나서서 싸워주는 정의로운 캐릭터이기도 해서 다프네를 하찮게 여기는 몹쓸 샤를에게 경멸조로 쏘아붙이곤 했는데, 샤를은 자기한테 싸늘한 이성을 처음 보고 압도된 모양인지 마농한테 욕을 먹으면서 태도가 조금씩 변한다. 친구한텐 괘씸하기 짝이 없어도 자신한테만은 열정과 순정으로 가득한 샤를을 마농은 점점 거부하기 어렵다.


‘나쁜 남자’ 클리셰를 답습하는 샤를은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자기 친구가 맞았으니 정당방위라면서 공공장소에서 유리병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인간이다. 아직 10대라서 갖가지 성급한 실수를 저지르기에 쉽게 미워할 여지를 주는 <스캄프랑스>의 대다수 캐릭터와 다르게, 마농은 유일하게 흠결이 없다. 매사 충동적이고 배려를 모르는 샤를을 매섭게 비난하고, 그런 샤를을 좋아하게 되자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솔직해야 할 때를 안다. 다프네가 이미 눈치채긴 했지만, 여전히 샤를을 좋아하는 다프네를 찾아가 샤를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힘들게 말한다. 절친이면서 때때로 철없고 눈치 없는 다프네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진실하게 말한다. 이로써 샤를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졌을 때, 마농은 샤를의 이복형 니콜라를 마주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샤를이 그간 언급을 피해왔던 가족이다.


샤를은 마농을 만나 좀 변했다. 그간 술, 폭력, 섹스와 가까운 허세형 인간으로 살아왔지만 마농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결혼 전 섹스는 안 하겠다는 마농의 신념을 귀담아듣고는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샤를과 사이가 좋지 않은 형 니콜라는 동생의 변화를 모른다. 그 동생이 만나는 마농이 어떤 사람인지도 당연히 모른다. 어느 날 동생 없는 집에서 요란한 파티를 연 니콜라는 마침 그때 집에 찾아온 마농에게 말한다. “샤를은 좀 복잡한 애야.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폭력적으로 변하지. 샤를이 나한테 너를 소개해주지 않는 건 이유가 있어. 난 너 같은 애들이 상처 받는 걸 많이 봤어.” 혼란스러워진 마농은 그때서야 술을 찾는다.


와인 몇 잔을 마시고 눈을 떴더니 알몸이었다. 옆에선 니콜라가 자고 있었다. 그 옆에선 같은 학교에 다니는 마리가 자고 있었다. 설마 셋이 한 걸까. 필름이 끊겼다. 그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없는 마농은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집으로 가는 길에 울면서 사후 피임약을 검색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GHB를 검색한다. 그건 동서양 불문하고 강간범이 쓰는 약물, 이른바 ‘물뽕’이다. 안 그래도 두려운 마농에게 사진이 도착한다. 니콜라가 보낸 나체 사진인데, 자신이 원본을 갖고 있으며 너의 몸 어디가 예쁘다는 식의 역겨운 메시지도 같이 왔다. 마침 마농의 열일곱 번째 생일 주간이라 샤를부터 시작해 룸메이트와 학교 친구들이 차례로 작은 파티를 열어주지만, 임신일지도 모르고 의식 없을 때 찍힌 나체 사진이 어디로 유포될지 알 수 없는 마농은 이 축하 분위기에 도저히 응답할 수가 없다. 가장 힘든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침내 마농은 힘들게 입을 뗀다. “나, 샤를의 형한테 강간당한 것 같아.” 방금까지 생일 파티로 신나 있던 다정한 친구들이 표정을 바꾸고 당장 경찰서로 가자고 권하지만 마농은 자신이 없다. “가서 뭐라고 해? 아무 기억이 없어서 신고도 못 해.” 한때 마농이 레즈비언이 아닐까 의심했던 다프네가 너는 아직 성 경험이 없으니 강간을 당했다면 어떤 증상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묻자 마농은 아니라면서 4년 전의 일을 털어놓는다. “열세 살 때 했어. 상대는 열다섯 살이었고. 난 준비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바로 차였어.” 이렇게 마농이 그간 이성 연애와 섹스를 경계했던 이유가 설명되고, 친구들은 이를 경청한 뒤 대책을 찾는다. “응급실로 가자. 원래는 즉시 갔어야 해. 씻지도 말고 옷도 갈아입지 말아야 증거를 찾을 수 있어.” 마농은 여전히 확신이 없다. “증거도 없잖아. 내 증언밖에 없어.” 다프네는 사회로부터 희망을 찾으려 한다. “아냐, 여긴 프랑스고 법이 우릴 지켜줄 거야. 정의는 존재해. 난 그렇게 믿어. 우리가 안 믿으면 누가 우릴 믿겠어?”


친구들의 판단은 옳았다. 병원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작품이 정확하게 보여주진 않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성폭력의 증상이 확인되지는 않은 것 같다. 즉 통상적인 의미의 강간은 없었던 것 같다. 담당 여성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마농과 친구들이, 나아가 작품을 보는 우리가 이런 범죄의 피해자가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았다는 것도 병원행의 소득이다. 다음 날 “네 나체 사진을 가진 사람을 짜증 나게 하지 말라”는 니콜라에게 마농은 해야 할 말을 한다. 


“협박하는 거예요?” 

“이게 협박하는 것처럼 들려? 그럼 협박이네.” 

“뭘 공부해요?” 

“국제 재무학.” 

“법학을 전공하지. 그럼 이런 상황은 없었을 텐데요.”

“무슨 상황?”

“아동 포르노그래피 유포로 기소되는 상황이죠.”

“장난해?”

“형법 제227조 23항이 뭔지 알아요? 아동 포르노그래피를 유포하면 징역 5년에 처해요. 난 미성년자라서 법적으로 아동이거든요.”

“아동 포르노그래피? 네가 무슨 아동이야?”

“그 말은 판사한테 해봐요. 그쪽 휴대폰에 있는 내 나체 사진은 내 동의 없이 촬영된 사진이니까 두 가지 혐의에 이미 유죄예요. 게다가 날 협박했으니까 (방금까지 한 대화가 녹음된 휴대폰을 보여주며) 징역 2년이 추가되겠죠. 다 합쳐서 징역 7년이네요.”


<스캄프랑스>는 법정 드라마가 아니다. 곧 니콜라의 구질구질한 반격이 시작된다. 사적 복수다. “어제 만나서 반가웠고 샤를한테 네 얘기 많이 했어.” 마농이 그 더러운 메시지를 확인하기 무섭게 샤를이 부리나케 달려와 절규한다. “형하고 자지 않았다고 말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니콜라한텐 범죄 사실과 처벌에 대해 똑 부러지게 경고했어도 여전히 그날 밤의 기억이 없는 마농은 샤를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모르겠어.” 눈물바다가 되었다. 마농은 무섭고 미안해서 울지만 샤를은 배신감과 분노로 운다. 아직 수사가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법체계 안에서는 마농이 승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농은 전말을 설명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오해로 갈등을 쌓아가는 통속적인 드라마 구조 안에서는 이처럼 무기력한 상황에 놓인다. 


결론을 말하자면, 잘 해결됐다. 그날 한 침대를 썼던 마리의 뒤늦은 증언에 의하면 성관계는 없었고 그저 와인 몇 잔 마시고 취한 마농이 샤를이 보고 싶다고 주정을 부리다가 스스로 옷을 벗고 누운 것이었다. 그런 마농을 동의 없이 니콜라가 촬영한 것이었다. 이후 니콜라는 자막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 곧 니콜라가 기소될 것이라는 소식을 알리며 <스캄프랑스> 시즌2가 전한 마농 이야기는 끝난다.     


가해자()의 시간     


이 이야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좀 많다. 마농이 술과 섹스를 즐기지 않는 캐릭터로 설정된 것부터가 성범죄 피해자의 순수함과 고결함을 강조하는 것 같다. 마농은 이른바 ‘노는 애’가 아니고 뒤늦게 털어놓은 첫 경험은 깊은 상처로 가득하기에 우리는 그 불안에 공감할 수 있다는 합의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한편 그렇게나 마농을 사랑한다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형 말만 듣고 와서는 형이랑 잤다고 섣불리 단정하고, 자신이 이 허술한 삼각관계의 희생자인 양 눈물까지 흘리는 샤를은 정말이지 꼴사납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유리병이 깨지도록 싸움을 벌인 샤를한테 정황을 알고 보니 피할 수 없는 대응이었고 반성도 하고 있다는 부연을 나중에 얹어서 면죄 기회까지 주지만, 샤를이 다프네에게 가져야 할 도의적 책임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낀다.


관대하게 해석하자면 그게 <스캄프랑스>의 매력일 수도 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일관성이 없다. 나한테는 선해도 타인한테는 악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면 일순간 너그러워질 수 있지만, 그러다가도 마음이 분노로 꽉 차면 진실에 눈과 귀를 열지 못한다. <스캄프랑스>의 캐릭터 대부분은 너무 충동적이라 사고를 치고 너무 수동적이라 오해를 부르며 때때로 그들의 감정과 태도는 일치하지 않는다. 비겁하고 무책임한 면면들도 자주 들킨다. 시리즈가 이런 고구마 같은 인간상을 계속해서 제시하는 것은 답답할지언정 다분히 현실적이며,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규칙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연출은 어렵기에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한 됨됨이로 묘사되는 캐릭터가 있다. 불법촬영 에피소드의 주인공, 신중하고 무결한 마농과 교묘하고 악랄한 니콜라다. 왜 둘의 성격만 전형적이고 평면적일까. 이렇게 선악을 대변하는 인물에게 납득할 만한 고유의 서사를 부여하는 것으로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 고정관념이 더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


니콜라의 ‘가해자다움’을 살펴보자. 니콜라는 불법촬영 사건 이후로 이 드라마에서 ‘사이코패스’로 규정된다. 이런 별칭을 붙여 가해자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것은 쉽지만, 적절할까.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2016년 장애인복지시설에 침입해 마흔 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열아홉 명을 살해한 우에마쓰 사토시의 예를 들어 이 용어 사용의 문제를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이런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사이코패스라 부르고 범행의 원인을 정신 질환과 같은 질병에서 찾는 관행은 “윤리적 행위를 자연적 인과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고 계획성까지 있다는 점에서 “아주 어렵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을 하는 데 ‘노련한’ 인간”이다. 극중 인물 니콜라의 불법촬영과 약자에 대한 혐오가 동반된 실존 인물 사토시의 연속살인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를 위반한 자를 과학적인 기준으로 분류하는 관성적인 방식이 범죄자의 행위 주체성을 축소할 수 있으니 사이코패스라는 용어 남용을 재검토하자는 것인데, 그런 용어 없이 사토시 사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위에 거론한 책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그럼 니콜라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마뜩잖아도 비슷한 인간을 좀 더 찾아보고 처벌의 수위를 살펴 유형화하는 것이 시작이겠다.


지긋지긋하게도 니콜라는 우리가 극보다 현실에서 더 많이 보는 유형이다. 특히나 ‘한국 니콜라’는 너무 많아 추리기도 피곤하다. 2020년 8월 대법원은 피고 박모 씨가 잠든 여자친구의 나체를 동의 없이 여섯 차례 찍은 것을 불법촬영으로 판단했다(원심이 2회에 걸쳐 무죄로 판단했으나 대법원이 이렇게 뒤집고 이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여러 여성의 신체를 39회 촬영한 유모 씨에게 2020년 11월 징역 2년, 성명불상 여성 피해자의 나체를 4회 촬영하고 유포한 최모 씨에게 2020년 10월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고, 피해 여성을 집에 데려와 성기를 촬영한 비공개 피고인에게 2019년 10월 의정부지방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이런 범죄는 너무나도 많아서 구체적으로 정리한 데이터를 찾기도 쉽다. 2012∼2018년 26,955건의 관련 범죄가 접수되었다. 기소된 피의자의 98.8%는 남성이고, 불구속 기소율은 97.4%이다. 선고 결과는 재산형(벌금형) 52.3%, 집행유예 30.1%, 자유형(징역·금고형) 9.4%, 선고유예 4.6% 순이다. 그리 엄격하지 않은 이 처벌에는 준거점이 있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2018.12.18, 2020.5.19 개정, 2021.1.21. 시행)’에 따르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것이 가해자의 현실이다. 한국에서 불법촬영을 하면 최대 7년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법이 겁을 줘도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적지 않을뿐더러 ‘운이 나빠야’ 2년간 죄수복을 입는다. 나는 궁금해졌다. 이것은 온당한 징벌일까. 이것이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가벼운 처사인지 아니면 반대로 가혹한 처사인지를 알고 싶어졌다는 것인데, 이를 파악하려면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의 법령이나 판례를 구글에서 찾아보면 한국이라서 이렇게까지 봐주는 것인지, 아니면 이게 국제 표준치를 반영한 것인지 정도는 알게 되지 않을까. 물론 둘 다 후련치는 않지만 영영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첫 번째 답은 이미 <스캄프랑스>에 있었다. 작품이 일러준 정보에 문제가 없다면, 마농의 이야기를 그린 시즌2가 완성된 시기(2018) 기준으로 프랑스에서는 형법 227조 23항에 따라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18세 미만을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유포했을 때 5년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영국 형법 33조 ‘고통을 유발하기 위한 사적인 성관계 사진 및 영상 공개’에 따르면 기소 후 유죄 판결 시 최대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연방 국가인 미국은 주마다 형법이 다른데(마땅한 법규가 없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성적인 목적으로 상대의 나체를 촬영하거나 감시한 행위’에 대한 처벌을 명시한 매사추세츠주 일반법 272조 105항에 따르면 2년 이하의 징역을, 피해 대상자가 18세 미만일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캐나다 형법 C-46 ‘관음증’ 항목은 성적인 목적을 위해 상대를 관찰 또는 기록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호주독일에도 비슷한 범죄에 대해 최대 2년형을 선고하는 법안이 있다.


기운이 빠진다. 내가 사는 곳에서 최대 7년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범죄를 북미와 유럽 등에서는 길어야 5년, 보통은 2년짜리로 정해두었다. 만연한 불법촬영에 대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처벌 수위가 결코 엄격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한국의 법이 그 가운데 엄중한 편이라고 올려치기하고 싶지도 않다. 여긴 가끔 제도가 참 공허하다고 느낄 만큼 법령상의 처벌과 실제 선고 격차가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의 현실과 통념을 잘 알지는 못해도 이게 미국에서도 경범죄로 통하는 건 알겠다. 쇼핑몰에서 여성의 신체를 동의 없이 촬영한 31세 남성에게 2015년 캘리포니아 법원이 5년형을, 비슷한 범죄를 대학 시절에 저지른 것이 발각된 30세 남성에게 2020년 캔자스 법원이 5년형을 선고했다. 불법촬영의 피해자들은 이런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2년, 5년, 7년이 지나면 과연 사라지는 고통일까.      


몇 가지 (부적절한용어들     


한국 법제처가 정의한 불법촬영은 “신체 일부나 특정 행위를 불법으로 촬영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행위의 

범위를 성폭력 분야로 좁히면 “성적 수치심 유발의 여지가 있는 사진 및 동영상을 촬영했다면 당사자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촬영 자체만으로도 범죄에 해당”한다. 불법촬영은 2017년 9월 대한민국 정부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 종합 대책’을 발표하면서 사용을 권고한 용어로, 기존에 쓰던 ‘몰카’가 “유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부적절한 표현임을 인지하고 바로잡은 결과다. 제도를 관장하는 측이 용어를 건조하게 수정해 범법 행위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불법촬영이란 말이 포괄할 수 있는 사건의 범위는 크다. 가령 이웃 감시와 직원 감시도 불법촬영이다. 동의 없는 신체 촬영으로 주로 여성이 피해를 입는 성폭력을 가리키는 더 구체적인 용어가 필요할 것인데, 다른 사회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영어권 사회에서 통용되는 용어에도 문제가 많다.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리벤지 폰revenge porn(ography)’이다. “관계가 악화됐을 때 이별에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이 ‘복수’ 수단으로 전 파트너의 노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유포한 숱한 가해 사례가 누적되고 확장되어 리벤지 폰은 “개인의 동의 없이 성적인 이미지나 동영상을 배포하는 것”이 사전적인 의미가 되었다. 영국 검찰청Crown Prosecution Service은 형법 33조를 ‘리벤지 포르노그래피를 둘러싼 기소 지침’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리벤지 폰은 시민의 법률 이해를 돕기 위해 공공 기관이 채택할 만큼 일상적인 표현이지만, 이 용어는 가해자의 고약한 의도와 행위에 억지 개연성을 부여하지 피해자의 고통을 반영하지 못한다. 영국의 여성 법학자 클레어 맥글린Clare McGlynn과 에리카 래클Erika Rackle은 이를 ‘이미지 기반의 성적 학대image-based sexual abuse’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2017). “이 용어는 리벤지 폰과 달리 이 가해 행위의 본질을 명확하게 포착하고, 피해의 성격과 정도를 전달한다.”


업스커팅upskirting이라는 용어도 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하는 정의에 의하면 “상대가 모르게 옷 아래에서 성기나 엉덩이를 촬영하는 매우 침범적인 관행”이다. 2017년 한 공연장에서 한 남성이 지나 마틴Gina Martin의 다리 사이로 카메라를 작동한 사건이 청원으로 공론화된 뒤 2018년 영국에서 ‘업스커팅 법Upskirting Bill’이 제정돼 2019년 4월 발효되었다. 약식 유죄 판결로 최대 1년의 징역형이나 벌금형이, 그보다 심각한 범죄의 경우 대법원의 재판을 거쳐 최대 2년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 이전까지 영국에서 관련 피의자는 관습법에 의거해 기소되었다. 이 범죄가 사회의 품위를 해치는 행위로 간주된 것이다. 업스커팅 법안 발효 1년이 지난 2020년 4월까지 16명의 남성이 48건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장소는 슈퍼마켓과 상점(33건), 대중교통(9건), 거리(5건), 학교(1건) 순이다. 거론된 범죄 현장 가운데 화장실이 없는데, 한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화장실 내 불법촬영은 영국에서 ‘관음증 (위반) 법Voyeurism (Offences) Act’에 저촉되는 범죄로 보인다. 한국에선 범죄 현장에 상관없이 범행 도구인 카메라에 초점을 두고 관련 범죄를 성폭력처벌법 14조로 통합해 관리하고 있다. 


영국의 업스커팅 범죄를 다룬 한 기사에서 피해자는 이 용어의 부적합성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업스커팅이 약간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그 행위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관련법이 만들어진 건 좋지만 이 행위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어릴 때부터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 피해자는 성을 빼고 이름과 나이만 밝혔다. 이름은 모건, 나이는 17세다. 17세 영국인 모건이 실감하는 것처럼 업스커팅은 한국의 ‘도촬’이나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표현인 ‘몰카’와 비슷하게 가볍지만 사실 더 불쾌하다. ‘옷 속 촬영’이 아닌 ‘치마 속 촬영’을 뜻하는 업스커팅(혹은 업스커트)을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다는 기계적이고 의도적인 중립 논지의 근거로 사용하기 전에, 통념상 이 행위가 어떤 성별을 표적으로 하는가를 보여주는 표현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게 먼저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이런 범죄가 증폭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전이라고 이런 가해와 처벌 법안이 없던 것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형법 647조 (j)항을 지역 변호사들이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자주 쓰는 표현은 ‘피핑 톰 로Peeping Tom Laws’다. 쌍안경과 캠코더 등으로 다른 사람의 은밀한 신체 부위나 성행위를 관찰하거나 촬영했을 때 이를 처벌하는 법안이다. 피핑 톰이란 말 그대로 ‘엿보는 톰’으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톰이 엿본 인물은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의 실제 모델인 레이디 다이바Lady Godiva다. 11세기 영국 코번트리의 영주 레오프릭 백작과 결혼한 고다이바는 과한 세금 징수로 고통받는 지역 백성의 현실을 알고 배우자에게 과세 기준을 바꾸라 간청하는데, 배우자는 거절하다가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건다.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아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증명하라 한다. 고다이바는 이를 받아들이고, 고다이바를 구원자로 여긴 백성들은 이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창문을 닫기로 약속하지만 톰이라는 재단사만이 이를 어기고 고다이바를 훔쳐봤다가 눈을 잃는다.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는 설도 있고, 하늘이 내린 형벌이었다는 설도 있다. 


피핑 톰은 관음증voyeurism의 동의어로 통한다. 관음증의 변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호기심인 경우가 많은데, 관음증을 연구한 한 논문이 인용한 대목을 가져오자면 그것은 “위험하고 특정한 형태의 호기심”으로 “흥분은 금지된 일을 하면서 발생하고, 관찰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을 보는 데서 비롯된다.” 관음증이라는 위반적이고 중독적인 감시 행위는 오랜 기간 정신과학 분야의 연구 대상이었지만 “병리학의 발달로 의학적인 개념은 점점 좁혀지고 있는 반면 대중문화에서는 확대되고 희미해졌다.” 탐정과 스파이의 활약상을 그린 문학, 수사물, 리얼리티 쇼, 파파라치 컷 등은 이 위험하고 특정한 시선이 인쇄 매체와 시청각 매체에 적극적으로 침투한 현실을 보여준다. 관음증은 엔터테인먼트다. 영국 영화 <피핑 톰>(1960)은 죽어가는 여성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촬영하는 예술가, 아니 연쇄살인자의 이야기다. 같은 제목의 포르노가 있다. 피핑 톰은 밴드의 이름이기도,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금기와 위반, 섹슈얼리티와 관음증, 나아가 빈부격차와 권선징악까지 범벅된 고다이바와 톰의 고전적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예술에 기생하고 현실에 개입해 우리를 무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과 규범은 자주 충돌하고 그 양상도 저마다 다르기에 일관된 규제를 주장하기는 어렵고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작품과 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함께 발전하는 관계지만, 그러나 둘은 논란이 생기면 상호적으로 가장 쉬운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예술이 문제시된다면 그게 다 현실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현실의 문제는 예술을 모방했다고 변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전제하면서도 예술이 미학을 명분으로 현실의 가해 행위를 두둔하는 것은 아닌지, 인격화해야 할 피해자를 수단화하는 것은 아닌지 비평할 수 있다. 심판해야 할 악행의 증거를 확보하는 감시 카메라의 순기능을 찬양하기 전에, 쿠팡부터 아마존까지 세계 어디서나 구매자 인증 절차도 없이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이 도구를 누가 더 많이 쥐고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인정할 필요도 있다. 관음증 연구에서 성별 불합리는 결코 빠질 수 없는 항목이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표적이 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여성은 ‘관음적인 이유로’ 표적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공격적인 시선은 남성의 것이다.”      


다른 피해자같은 피해자     


‘관음적인 이유로’ 표적이 되는 여성을 넷플릭스에서 참 많이 봤다. 이 가해 행위가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에서 잠깐 스쳐 가는 위기 요소로만 쓰인다는 것도, 이 문제를 법망 바깥에서 남성이 ‘해결해준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적극적으로 복수하는 가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스팟리스>(영국, 프랑스)와 <죽음의 흔적>(폴란드)에는 불법촬영 가해자를 흠씬 두들겨 패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있다. <스팟리스>의 아버지는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딸에게 이 응징으로 아버지 역할을 증명한다. <죽음의 흔적>의 아버지는 폭력적인 수사 방식으로 늘 문제를 일으키는 경찰인데, 작품은 딸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도 가해자를 찾아가 똑같이 대응하도록 해 이 캐릭터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영화 <의혹의 맹점>(인도)에선 두 여성이 눈물을 흘린다.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울고, 피해자의 어머니는 가해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워달라고 애원하며 울다가 뜻하지 않게 피해자를 죽인다. 이때 나타나 시체를 ‘완전 범죄’로 처리하는 아버지의 능력이 작품의 핵심이자 주요 쾌감 요소로 연출된다. 폭력에 대한 사적인 폭력은 그 자체로 악순환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나쁘다.


어머니가 나서기도 한다. <데드윈드>(핀란드)의 소피아는 남자 동급생이 딸의 성관계 영상을 찍고 친구들과 돌려 보고 있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업무를 중단하고 직접 해결하러 나선다. 먼저 딸 헨나에게 가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곧바로 학교로 가서 가해자인 칼레를 불러내 수갑을 채우듯 힘으로 제압하고는 문제의 영상을 공유한 단체 채팅방을 지우라고 겁박하고 원본 파일이 있는 노트북을 압수한다. 그리고 칼레의 따귀를 때린다. 이에 대한 반격은 가해자의 아버지가 맡는다. “사내 녀석들은 종종 생각 없이 이런 일을 저질러요. 그러나 언제나 일은 둘이 벌이는 것이죠. 댁의 딸이 강요받은 건 없지만, 명백한 사실은 당신이 학교에서 제 아들을 때린 거죠.” 나는 이런 진부한 악역을 볼 때면 헷갈린다. 작품이 진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피해자의 고통일까, 가해자의 논리일까. 


저 말로 우리가 만국 공통 부전자전을 확인하는 동안 소피아는 칼레 아버지 눈앞에서 ‘비싼’ 노트북을 부수지만, ‘딸의 아픔’으로 번역한 제목이 달린 이 에피소드(시즌1 6화)는 그리 후련하지 않다. 불법촬영 전말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어도 갈등의 초점은 소피아의 폭력성이다. 소피아는 <죽음의 흔적>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수사 지침을 무시해 매번 일을 그르치는 위압적인 경찰이다. 게다가 이 소란스러운 해결은 피해자인 헨나가 원한 방식도 아니다. 학교도 싫고 가족에도 무심한 헨나는 소피아를 ‘소피아’라고 부른다. 엄마가 아니라 얼마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빠의 새 아내로만 여기는 것이다. 그 죽음의 원인이 ‘새엄마’에게 있다고 보고 소통을 피하는 헨나는 소피아가 일터에서는 물론 집에서 감당해야 할 일과까지 예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데드윈드>를 보면서 소피아가 처한 개인적인 현실에 공감할 수는 있지만,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수사물마저 불법촬영을 핵심 서사에서 곁다리 갈등의 수단으로만 취급한다는 것은 이 범죄에 대한 집단적 의식을 보여준다. 그건 작품의 축인 살인 사건보다는 확실히 ‘가벼운’ 것이다. 


그래도 <데드윈드>는 피해자가 겪는 공통적인 고통과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전하기는 한다. 이 가해 행위엔 연속성이 있기에 조속히 해결해야 추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도 언급한다. 소피아는 피해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장 먼저 헨나에게 달려가 묻는다.


“너한테 폭력을 썼니?”

“그런 건 아니에요. 계획적이었을 텐데 증거가 없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알지? 고소할 수 있어.”

“그냥 놔두세요.”

“그럼 난 뭘 해야 하니?”

“아무것도요.”

“칼레가 그 짓을 계속하게 둘 셈이야? 또 다른 먹잇감을 찾을 거야.”


앞서 만난 <스캄프랑스>의 마농이 그랬던 것처럼 <데드윈드>의 헨나도 피해 사실을 안 직후 이 계획적인 범죄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에 무기력한 상태다. 마농과 헨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두렵고 화가 나 마음이 복잡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황급히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도 상당한 피로를 느낀다. 영상이 유포되고 확산되는 속도를 생각하면 이런 범죄는 빨리 처리해야 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똑같은 속도로 살지 못한다. 당장은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진다. 그러니 지체할 수만은 없는 일이고, 혼자 감당하는 것은 버겁다. 누가 언제 어떻게 해결사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 <데드윈드>에서는 보호자이자 경찰이 무력으로, 직권 남용으로 처리했다. <스캄프랑스>에서는 친구들이 돕고 응급실 당직 의사가 힘을 실은 끝에 피해자가 가해자와 직접 대면했으며 사건은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갔다. <데드윈드>보다는 훨씬 나은 방식이다.


<스캄프랑스>를 시작으로 삼은 건 불법촬영 범죄를 다룬 여러 작품 가운데 이것이 가장 전문적이고 성찰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사례가 나온 작품 대부분이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가해와 피해를 부수적인 갈등 요소로 삼지만, <스캄프랑스>는 너무나 빈번해서 현실적이면서도 ‘선정적인’ 사건을 펼쳐놓은 것에 대해 끝까지 책임감을 갖는다. 피해자의 감정 상태를 묘사하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쓰고 관련법과 처벌 절차를 대사에 녹이며 그 발언권을 피해자에게 준다. 덤으로 강간 피해 즉시 대처 요령을 알려주는 동시에 사회 정의 실현은 그(프랑스) 사회가 확립한 제도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희망을 전한다. 성폭력을 다룬 모든 작품이 예방과 대처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스캄프랑스>가 완벽하다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는 프로파간다가 아니지만, 도식적인 서사 구조 위에서 법적 가치를 나누는 연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식은 딱딱한 법문을 찾아 읽는 것보다 이런 조건에서 익힐 때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거론한 모든 작품에는 문제 해결을 돕는 어른이 등장한다. 주로 보호자인데, 피해자의 연령 때문이다. <스캄프랑스>의 마농은 만 17세다. <데드윈드>의 헨나도 같은 나이다. <스팟리스>의 피해자는 생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신체가 촬영된 것을 모른 채 파일 공유 위협을 느끼는 일방적인 피해자이지만, 이것이 디지털 장비를 통한 ‘소통’이 되면 다른 용어를 쓴다. ‘섹스팅sexting’이다. 연인 사이에서 성적인 메시지, 혹은 그러한 사진이나 영상을 주고받는 것이다. 영어 사용자인 10대들에게 더 가까운 표현은 ‘누드 사진 보내기sending nudes’ ‘고추 사진dick pics’이고 섹스팅은 늙은이들이나 쓰는 말로 여긴다는데, 이런 노골적인 설명을 꽤 진지하게 해주는 문서는 대부분 계도 방안을 상세하게 제시하는 청소년 교육 기관에서 발행된다. 미국 기준으로 10대의 40%가 섹스팅에 참여하는데 여성의 비율이 더 높다. 섹스팅에 참여하는 10대 여성의 40%는 농담으로, 34%는 성적 흥분을 위해서, 12%는 압박감으로 한다. 17%가 이를 타인과 공유한다. 이 통계는 섹스팅이 청소년 사이에서 또래 문화로 자리 잡은 아슬아슬하고 불편한 장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상황에 대한 연구도 있다(2015). 서울 거주 고등학생 547명(남 182, 여 365)을 대상으로 한 섹스팅 실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청소년의 23%, 남자 청소년의 37%, 여자 청소년의 16%가 이성 교제 대상과 본인들의 성적인 사진/동영상/문자를 수신 혹은 발신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연구는 이성 교제 시 남자 청소년의 경우 관계에 확신이 없거나 상대에게 둔감할 때, 여자 청소년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섹스팅 참여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는데, 이는 여성이 불가피하게 동참하거나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일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남자 청소년에게 “이성 관계에 대해 소중히 생각하고 이성 친구를 성적 쾌락의 상대로 인식하지 않도록 올바른 이성 관계 관념을 증진시키는 개입이 요구된다.” 그것이 교육의 역할일 것인데, 한국에서 매체가 청소년 섹스팅 문제를 취재하거나 연구를 바탕으로 제도가 정책을 제시할 때면 대개 디지털 성범죄로 논의를 확장해 그 위험성에 주목한다. 반면 영국 인터넷 안전위원회의 실무 교육 지침은 가능한 처벌 법안도 언급하지만 학교와 가정에서 보호자의 교육 의무를 강조하고, 이것이 “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관계 탐구의 결과”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개별 사안마다 충분한 소통을 통해 정도 차이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다. <스캄프랑스>에는 잔가지로 그 이상을 제시하는 장면이 있다. 다프네가 첫 경험을 앞두고 있을 때 친구들은 다프네를 보건 교사에게 데려간다. 그렇게 해서 콘돔 사용법을 배웠지만 그걸 원치 않는 샤를과 첫 경험을 한 후에는 임신일까 의심스러워 보건실로 다시 찾아가 답을 얻는다. 저게 프랑스의 현실일까 드라마일까. 그걸 모르는 나는 청소년이 섹스를 학교에 상주하는 전문가와 상의할 수 있다는 게 이상적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를 높이 사는 시선은 좀 이상하다. 그 시절은 모든 어른에게 있는데 왜 그 시절에 필요했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는 것이 어려울까. 그간 미디어를 통해 너무 많은 피해와 가해 사례를 접해왔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금지 너머의 대안을 찾아보고 익히기를 미루는 것은 아닐까. 교육이 제 역할을 하도록 우리는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할 테지만 <스캄프랑스>가 그런 소통에 도달하는 노하우까지 알려주진 않는다. 그건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 구해야 할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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