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색을 넣다
하지만 어느 결에 보니 내가 유화를 그리고 있었다. 유화는 연필묘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둘다 색을 쌓아가는 방식이고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열심히' 그리면 중간은 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래 그림은 완전 초창기에 그렸던 유화들이다. 주로 사진을 보면서 그리기 쉬운 것으로 골라 그렸고, 모작도 한번 해봤다.
정물화도 그렸다. 화실에 있던 정물이나 구하기 쉬운 사과와 바나나, 오렌지, 석류 등이 주요 대상으로, 가끔씩 선생님은 엉뚱한 것들을 구해오기도 했다. 한번은 시장을 지나가다가 무우 한다발을 사와서, 모두들 둘러앉아 그걸 그렸던 기억이 난다.
나무판에 낙서도 하다가 인물화도 그렸다.
한동안 줄창 유화만 그려댔다. 아래쪽 가운데 그림은 목판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거다. 예상과 달리 목판에 물감이 잘 묻는 편이 아니어서 엄청 헤맸던 것으로, 더 재미난 건 근처 액자집 사장님이 오만원에 사갔다는 거다. 소장용은 아니고, 되파는 용도였는데 어디에 팔았는지는 모르겠다. 내게 오만원 줬으니까 아마 십만원에 팔았을텐데! 어쨌든 그 이후 액자집에서 내 그림 - 주로 명화 모작한 것 -을 사갔다. 가격이야 저렴했지만 그래도 팔린다는 게 신기하긴 했다. 가장 오른쪽 그림은 누런 소포용지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이다.
가장 먼저 했던 모작은 도상봉 화백의 그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래 그림 중 왼쪽과 오른쪽. 그중 왼쪽에는 선생님의 마지막 붓터치가 들어갔으니 내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클림트의 풍경화와 고흐 그림 모작도 했고, 클림트 풍경화 4점은 한꺼번에 팔렸는데, 그 사실이 여전히 신기했다. 이걸 사간다고? 그런데 다시 보니 열심히 그리긴 한 거 같다.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작년에 동유럽 여행을 하면서 클림트의 풍경화 진품을 볼 기회가 있었다. 진품의 경우 색깔이 훨씬 연하더라고. 세월이 흘러서 색깔이 바랜 건지, 혹은 원래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에곤 실레의 빨래터 그림은 언니가 갖고 싶다고 해서 줬다.
아래는 고흐 그림의 모작이다. 가운데 그림은 엄마 집에 걸려있고 나머지 두 점 역시 판매되었는데, 이건 내가 선택해서 그린 게 아니라 액자집 사장님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았다면서 그려달라고 캔버스를 줘서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명화모작을 하다가 지겨워지면 어디선가 구한 사진을 보고 그리기도 했다. 혹은 두세점을 동시에 그린 적도 많다. 유화는 어느 정도 마른 후에 색을 올리는 게 훨씬 좋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 차이를 두고 그리면 되려 편하다.
그렇게 열심히 그렸지만 나의 그림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게 나의 한계일까? 더 이상 발전은 없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번역일과 수업준비 분량이 많아져서 일단 거기서 중단하고 쉬기로 결정했다. 그게 실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다시 시작하고 어느 정도 기간이 흐른 후에 판명이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