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여정을 향해 출발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사람들은 전시회는 언제 하느냐고 묻는다. 전시회라니, 뭔 당치도 않게! 겸손한 척 하는 게 아니라,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실력이기 때문이다. 맞다, 턱없이 모자란다. 게다가 시작하고 삼년 정도는 아주 '가열차게', 그 이후 두 해 정도는 '쉬엄쉬엄' 그렸으나 여전히 선이 딱딱한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기서 멈췄고 거의 오 년 이상 손을 놓은 거 같다.
이제 서식지 이동을 계기로 진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하고, 그 전에 한번쯤 되돌아보는 시간 혹은 온라인 전시회(?) 삼아 몇 편 써보려고 한다.
그림을 시작한 건 2013년이다. 호주에서 돌아온 후, 집-학교만 오고가며 강의준비와 번역일만 하면서 지내다가 노후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세대보다 기대수명이 훨씬 늘어나는 바람에 갱년기 이후 3-40년은 더 살아내야 하는 당면과제가 등장하고, 세상의 변화에도 가속도가 붙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완전 고립될 위기에 놓이게 될 게 너무나 명확했다.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건 대략 세가지 - 경제력과 취미활동과 친구 - 이다. 경제력의 경우, 나는 평생 적게 벌고 적게 썼기 때문에 똑같이, 한결같이, 미니멀하게 살아가며 해결하고 있다. 친구가 필요하다고 해도, 원래 사람사귀는 데에는 젬병인데다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특히 밤은 상당히 길기에,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없이, 아무런 감정적 문제없이 무조건 내 옆에 있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서른 중반 이후부터 혼자 덩그러니 남을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했던 건, 대학을 막 졸업한 후 그 당시 웨딩드레스 샵이 줄지어 있던 아현동 거리를 지나가면서 저 옷을 입어볼 일이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보통’의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으나, 유난히 힘 없고 손가락 사이의 소위 물갈퀴가 유난히 넓은 손이기에 기타를 배울 자신이 없었다. 결국 서식지 근처의 취미 화실에서 연필 정물 묘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좀 황당했던 건, 그림 수업 첫날에 한쪽 벽에 달린 새 박제모형을 가리키며 무조건 그리라는 거다. 내 생각으로는 그냥 포기시킬려고 했던 거 같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나이든 사람이 오면 길어야 석달이고 나는 며칠만에 그만둘거라 예상했다고. 어쨌든 지금보니 형태가 요상하긴 하지만 벽에 걸린 부엉이 박제를 쳐다보면서 낑낑대며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잉? 이거 너무 재미있는 거 아니니? 완전 푹 빠져서 번역일과 강의 및 준비 시간외에는 화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냐고? 그건 아니었다. 선생님도 약간 괴짜였고,겨울에는 화실 화장실 물이 얼어서 근처 주민센타 혹은 스타벅스에 가야할만큼 허름한 시설이었기에 화실비가 엄청 저렴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실 연필소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열심히 그리기만 하면 그럴싸하게 보인다. 주로 정물을 실제로 놓고 소묘를 했다. 내 주먹도 그렸구나!
사람의 경우는 모델을 세울 수 없으니 사진을 보고 그렸다. 아무래도 2차원으로 해석이 모두 되어 있는 사진은 실물 묘사보다는 쉬운 편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아래 그림들은 유화를 그리면서 간간히 그렸던 것 같다. 특히 부드러운 천을 그리거나 투명한 물체를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가끔은 입시 준비하는 아이들 옆에서 그들과 비스한 수업을 받기도 했는데 뭐, 역부족이라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취미와 입시는 완전 다른 거니까!
가끔은 파스텔도 사용했다. 문구점에서 파는 평범한 문교파스텔로 그린 거고, 파스텔화라고 하면 연하고 아련한 느낌을 상상하게 되지만, 진하게 사용하면 유화느낌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처음 화실을 찾아갔을 때는 이것저것 들고 다니기도 싫어서 연필묘사만 배우겠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거의 일년동안 줄창 연필 혹은 목탄 혹은 파스텔만 사용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림 그리기에 그렇게 폭! 빠져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그림 여정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못했던 것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생각만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던 것들은 시간이 남아도 하지 않게 되기에,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아주 조금씩 습관을 들여야 한다. 돌이켜보니, 그나마 늦었다고 여겼을때 시작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은퇴를 한 다음부터 시작했다면 더 힘들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