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아줌마의 세상 2026
바쁘면 좋다는 말을 들을때마다 고개를 갸웃한다. 쓸데없이 바쁘거나 치이면 번아웃이자나. 게다가 좋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꽤 오랜시간 몰입하면 행복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에 몰입하면 행복했을까?
1. 소설책 & 만화책
아주 어릴 때부터 뭔가 읽는 것을 좋아했다. 동화책도 좋아했고, 만화책도 좋아했고, 그 당시 유행하던 <<금성사 백과사전>> 이나 <<계몽사 전집>>도 좋았다. 오빠 언니 책가방 속에서 국어교과서를 꺼내 이야기 부분만 읽기도 했다. 소위 호랑이 담배 피우던 '라떼' 시절에는 비디오도 인터넷도 OTT도 없어서 소설책과 만화책과 라디오 청취가 가장 흔한 오락거리였고 80년대 대학생 시기에도 비슷했다. 공강시간에 만화방에 가고, 당시로서는 꽤 좋은 조건을 갖춘 학교도서관에서 대출하거나 서가에 앉아 소설책을 마음껏 읽고, 빙글빙글 지하철 2호선은 곧 독서실이었다.
그나마 그게 밑바탕이 되어서인지, 대학 졸업후 적당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나, 극강의 'I' 성격, 엄청나게 소심하고 낯선 사람에게 말한마디 걸기 힘들어한 게 원인이었는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낯선 사람 포비아 & 전화 포비아가 있는 내게, 번역은 딱 맞는 직업이라 여겨졌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없으나, 삼십년 넘게 했으니 좋아했던 건 맞는 거 같다. 한가지 아이러니 한 건, 번역이 직업이 되자 늘상 보는 게 단어와 문단과 문장이 되다보니 일부러 책을 찾는 일이 드물게 되고, 번역강사가 되자 접하는 텍스트 주제가 경제와 법률, 시사, 정치, 논문 등으로 변했다는 거다. 그래도 번역을 시작하면 하루 열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 정도면 몰입했다고 볼 수 있을거 같다.
다시 나만의 책 세상으로 돌아온 지금, 독서 방법이 바뀌었다. 한국의 책들은 워낙 좋은 종이를 사용해서 유난히 무겁고 외국처럼 페이퍼백 에디션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전자책을 이용하는 중인데 그게 예상보다 괜찮다! 오, 나 이렇게 노마드가 되어가는 거니?
2. 그림
나를 가장 몰입시킨 건 그림이다. 예술이니 재능이니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그리는 행위가 좋으니까. 그 시작은 2013년 무작정 동네화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일단 화실비가 저렴한 허름한 곳을 찾았다. 맞다, 허름 그 자체였다. 낡은 건물에 좁고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고, 겨울에 화장실 물이 얼어서 근처 주민센터나 스타벅스에 잠입하여 해결했다. 그래도 S대 회화과 출신의 선생님 실력은 출중했고, 비록 성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내 성격도 그리 평범한 건 아니어서 그럭저럭 이해하고 넘어갔다.
내 평생 그토록 깊게 몰입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삼년 정도는 완전히 화실에서 살다시피했고, 그 이후 드문드문 두 해 정도 더 다니다가 내가 넘지 못하는 내면의 벽, 능력의 벽이 가로막았을 때 그만두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번역일에 매달리고, 코로나 시절에는 서식지에 들어박혀 줌 강의만 줄창 하다가 은퇴후 삼년 넘게 밖으로만 싸돌아 다니다가, 작년에야 ㅎ대 평생교육원에서 두 학기동안 아크릴 강좌를 들었다. 거기서 마주한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몇 년전 그림을 그만두게 만든 한계는 어디 가지도 않고 거기에 그대로 얌전히 있었다. 마치 내 담낭을 가득 채운 자잘한 담석들처럼 말썽은 부리지 않지만 저절로 녹아내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 내게 너는 꼭 그림을 그려야할 사람이라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노후에 에너지 부족 저질체력형인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취미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미련이 남는 걸까? 이유는 단순했다. 몰입에의 황홀한 기억 때문이고, 아직 포기는 안했으니, 진정 포기할 때까지 계속 하겠지.
3. 여행
여행이 몰입과 뭔 관계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여행가기 전날까지는 일부러 돈 내고 고생하나 싶다가 일단 떠나면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억지로 기억해도 두고온 현실은 꿈결처럼 느껴지고 여행지가 현실이 되어버린다. 하루 정도 지나면 그곳에서 오래 살아온 기분을 느낀다. 비록 한가한 일상이지만 그 마저도 벗어날 수 있기에, 힘들어도 떠나는 거 같다.
처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 혼자니까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운전 못하는 뚜벅이에 특이할 정도로 소식좌이기에 먹성 좋은 또래 아줌마 친구들을 대동하기도 힘들고, 25리터 배낭 하나도 꽉꽉 채우기 힘들만큼 저질체력이므로 단점도 명확하다.
그래도 해봐야 나도 몰랐던 나만의 스타일을 알게 되고, 그게 곧 일상의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힘들어도, 어려워도, 짧게나마 여행하면서 나와 낯선 환경에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원하는 게 달라서 이게 옳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여행을 가는 이유를 찾긴 한 거 같다.
최소한 지금까지 알게된 몇가지 사항
1. 남들이 보는 나도 실제와 다를 경우가 많지만, 내가 생각했던 나 역시 사실상 내가 아닐 수 있다
2.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처음 몇번은 힘들지만 원한다면 일단 하고 봐야한다.
3. 다른 이들이 좋아해도 내게 안맞는 게 많다.
4. 여행을 포함해서 세상일은 변수의 연속이므로 예상과 달라도 그냥 그려려니 해야한다.
5. 가끔 실수해도 괜찮다. 실수했다고 인생 거덜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나를 달래고 여행과 나만의 스타일을 알아가며 여행에의 몰입을 꿈꾼다. 더 나아가 그림과 글과 여행을 서로 연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길 소망한다. 이건 진심으로 반드시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