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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Sep 11. 2023

그림그리는 아줌마

마녀 아줌마의 세상살기

부모님 세대와는 너무나 많은 게 달라졌다. 인생에도 후반전이 생긴 거다. 오십대 중반 이후, 은퇴 이후, 갱년기 이후의 삶이 길어졌다.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못했던 것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매일 여행만 다닐수도 없고,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해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던 것들은 시간이 남아도 안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은퇴 전에 조금씩이라도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또한 은퇴 후 친구가 오십 명은 있어야 한다는 둥, 백 명은 되어야 한다는 둥 말은 많은 데,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도 상당히 길다. 특히 낮 시간은 이렇게 저렇게 보낸다고 해도 밤은 상상보다 긴 데다가,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지고 한밤중에 깨거나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솔직히 고백컨데 나는 서른 중반 이후부터 나 혼자 덩그러니 남을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보통’의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것이다.


노후의 가장 크고 중요한 경제력 문제는 가능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들어오는 것보다 덜 쓰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외에도 혼자 살아내야 할 시간 문제가 크게 다가왔다. 평소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던 사람들도 은퇴 후에는 많이 외롭다던데 나처럼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본 적도 없는 싱글은 '100% 독거노인 당첨' 각이었다.


“그래, 혼자 할 수 있는 취미가 있어야 해!“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없이, 아무런 감정적 문제없이 무조건 내 옆에 있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지만 유난히 힘 없고 짧은 손가락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서식지 근처의 취미 화실을 알아보고 다니기 시작해서 연필 정물 묘사를 배웠다. 오잉? 이거 너무 재미있는 거 아니니? 완전 푹 빠져서 번역일과 강의 및 준비 시간외에는 화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연필 정물 묘사는 인내심으로 해결 가능!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냐고? 그건 아니었다. 그 당시 화실은 선생님도 약간 괴짜였고, 겨울에는 화장실 물이 얼어서 근처 주민센타 혹은 스타벅스에 가야할만큼 허름한 시설이었기에 화실비가 엄청 저렴해서 도움이 많이 되었으니까.


이후 몇 년이 흐르고, 나는 은퇴를 했고, 남는 건 시간뿐인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 화실도 다니지 않아서 그림도 혼자 그려야 했다. 서식지 한 구석에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아마추어가 홀로 그림을 그리기란 정말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화실에 다닐때도 거의 혼자 그렸기 때문에 그런 이슈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나의 목표가 살짝 바뀌었다는 거였다. 화실에 다닐 때 간간히 명화모작을 해서 저렴한 가격에 팔곤 했고, 그때는 그냥 그렇게 소일거리로 명화를 모작해서 노는 겸 커피 값이나 벌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모작을 하면 답답함이 느껴져서 하고 싶지 않았다. 능력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나만의 그림체’를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간간히 펜으로 그려두었던 ‘마녀 시리즈’에 색을 입히려고 여러번 시도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유화로 그리자니 재료가 너무 무거워 경쾌한 분위기가 안나고, 아크릴 물감은 몇 번 사용해 보지 않아서 다루기가 어려웠다.


절망하던 그 순간, 아이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2년 전에 구매를 했지만 앱도 낯설고 애플펜슬도 낯설어서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저 비싼 아이를 괜히 들였다는 자책감만 잔뜩 안겨준 그 녀석.


“쟤가 날 도와줄 수 있을까?”


처음에는 ‘내일배움카드’로 학원에서 배우려고 했다. 그런데 학원 측에서 인원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개강 날짜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더라. 역시 공짜로 배우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결국 ‘나이 들면 독학해야해!’라는 나의 지론에 맞게 책 하나 대여해서 혼자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고, 우연히 찾아낸 책이었지만 운빨이 좋아서인지 내게 필요한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그림그리는 마녀 아줌마

그렇게 아이패드를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약 3주 정도 지났는데  나름 해볼만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녀시리즈 혹은 가끔씩 머릿속으로 불쑥 불쑥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 같다. 글을 쓰면서 그에 어울리는 그림도 같이 그리고 싶다는 바람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유화나 손 드로잉을 안하겠다는 건 아니다. 활용할 수 있는 도구와 재료는 ‘다다익선’ 이고, 하다보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방법도 생길 것 같다.


덧붙여서, 이것만으로 내 인생 후반전이 완전 풍성하거나 화려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게 있다면 한가지 안정적인 것을 손에 쥐게 되면 세상이 밝아보이고, 그 세상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는 거다. 그래도 내가 걷기 시작한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평탄한 길이 이어질지, 낭떠러지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 아마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나타날 확률이 가장 높겠지. 늘 그랬으니까. 망치고 또 망치고... 이렇게 하기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자그마한 성과 하나를 얻을 수 있었으니 안전벨트 꽉 쥐고 가야해. 그래도 이불 밖은 위험하다면서 그 속에 웅크리고 있지 않고 계속 걷고 싶다는 자그마한 소망이 생겼으니 그걸로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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