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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Dec 22. 2023

햇빛은 중요해

마녀 아줌마의 세상살기

지난 번 서식지는 북향이고 창문이 한 개였지만 창이 큰 데다 바로 앞이 교차로여서 소음 문제는 있어도 햇빛 이슈는 없었다. 되려 직사각형 내부의 가장 긴 면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에서 강한 햇살이 들어오는 바람에 블라인드 세 개 중 한 개 종일 내려놓아야 했으니까. 현재는 동향이고 창문은 똑같이 한 개지만 내부에서 보자면 짧은 면에 달려 있고 크기가 작아서 어두운 편이므로, 내부로 스며드는 햇빛을 볼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직장인이나 학생에게는 최적의 위치와 상태를 자랑하지만 중년 아줌마의 서식지 혹은 사무실로는 그리 적합한 곳은 아니다. 방향이나 창문의 크기와 갯수의 중요성과 과거 프랑스 파리에서 창문 갯수에 따라 재산세를 부과한 이유를 이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다만 강남 한복판 치고 조용하고 안전하고 대중교통 편하고 헬스장과 다이소와 노브랜드와 마트가 가깝다는 장점은 있으므로 이곳을 떠날 때까지는 그 장점을 누리는 것으로 마음의 타협을 보았다. 


어린 시절에도 집에 대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해에 지은 집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았기에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어린 마음에 '이사'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새 집에 가면 당연히 공간도 커지고 내 방도 생기고 침대도 생길 것 같아서 전학오거나 간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으나, 삼남매가 훌쩍 자라는 동안에도 집이 변하거나 커지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언니와 내가 같이 쓰던 일명 '가운뎃 방'의 경우, 그 곳을 거쳐야만 부엌으로 들어가는 신기한 구조여서 프라이버시(?)는 조금도 없었는데, 어려서 그랬는지 그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사가는 꿈은 늘 꾸었던 것 같다. 결국 스케치북에 새로 생길 내 방 도면만 크레파스로 그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맙소사, 지금도 똑같아. 단지 스케치북은 아이패드로, 크레파스는 애플펜슬로 바뀌고, 그 당시는 내 방의 가구 위치만 그렸지만 지금은 집 전체를 그리는 게 달라졌을 뿐이다. 이번에도 대략적인 도면을 그려보았다.


발단은 햇빛이었으나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아늑함과 편안함과 밝음과 단순함.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언제나 행복의 제 1 조건으로 꼽는 '마음의 평화'이다. 약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남향이나 남서향의 밝은 공간. 실평수 최소 12평에서 최대 15평. 단순하고 유지하기 쉽고, 수납공간을 늘리기 보다는 물건을 줄이고, 주방은 가능한 숨겨놓고, 벽체가 아니라 가벽이나 최소한의 가구로 공간을 분할하고, 가능한 문을 달지 않는 공간. 만약 내가 조립식 주택을 가질 수 있다면 딱 저런 구조로 만들고 싶고, 아니라면 비슷하게 구조변경을 할 것 같다.


하지만 공간만 생긴다고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는 건 아니다. 서식지가 바뀐 후 며칠 동안은 이상한 우울증을 경험하는데, 한국에서 호주로 유학간 첫 날에도 외국 특유의 어둡고 노란 불빛과 천정이 가슴을 짓눌렀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옮겨도 낯선 장소이므로 익숙해질 때까지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모든 것을 다시 세팅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아마 상당기간 헤맬거고, 불편할 거고, 괜히 이사를 했다는 후회도 살짝 할거고, 떠나온 곳과 비교하면서 군시렁 대겠지. 어쩌면 엄청난 후회를 할 지도 몰라. 


모든 일이 그랬다. 하기 전에는 걱정과 우려가 몰려오고, 시작한 직후에는 이미 저질러 버린 일에 대해 살짝 후회할 때도 많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그나마 안정이 되고 나서야 그래도 하길 잘했다며 힘든 기간을 견뎌낸 나를 칭찬한다. 가끔 '실패'로 규정되는 결과가 발생하는데 그럴 경우 솔직하게 인정하고, 비록 마음이 아플 터이나 내가 놓친 것이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수습할 방법을 찾는 쪽이 더 낫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가르쳤음에도 실제로 실패하면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야단치면서, "거 봐라 내가 뭐랬니?"라고 한다. 그런 반응만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훨씬 더 성숙해질 수 있을텐데.


현재의 상당히 안정되고 규칙적인 생활을 자발적으로 흔들어 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 내내 똑같은 모습으로 살 방법도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변동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의 어른스러움을 장착하여 햇살의 향연을 맘껏 누리게 되길 소망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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