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세살 터울의 형과 함께 자라다보니 자연스레 형이 입던 옷을 물려입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형이 입던 옷말고 개성을 뽐낼 수 있는 나만의 옷을 가지고 싶었다. 옷에 대한 집착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때의 억울했던 감정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를 맞이하고 남녀공학인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옷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덩치도 크지 않았고 얼굴도 잘생긴 편이 아닌지라 내가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옷을 잘 입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학생에게 멋지고 다양한 옷을 사입는 것은 큰 무리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붙잡고 용돈이나 카드를 달라고 조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모님께서는 나의 그런 처지를 가엽게 여기신건지, 가끔 카드를 쥐어주시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시내에서 마음에 드는 각종 보세옷을 사서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부모님은 나에게 꾸지람을 주시곤 하셨다. "한번 살 때 싸구려 옷 말고 좋은 옷 좀 사", "너한테 어울리는 옷을 좀 사던가 그게뭐니" 등등 이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속으로 "엄마가 뭘 안다고..!", "나는 이 옷이 좋단말이야..!"라며 혼자 씩씩대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나서조차 나의 옷에 대한 애착은 식지 않았다. 캠퍼스에서는 동기 및 선후배에게 호감을 얻고싶은 마음, 군인일때는 휴가 나왔을때 민간인처럼 보이려는 마음, 직장에 들어갔을때는 회사동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싶은 마음들이 나의 옷에 대한 집착을 지금까지 끌고오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값비싼 명품 옷들을 사는것은 그저 사치일뿐이고, 저렴하지만 좋아보이는 이른바 가성비 좋아보이는 옷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라고 스스로를 속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옷들은 금세 질리거나 해져서 몇 번 입지 못한 채 옷장 한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새로운 옷들을 자주 찾게되면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지내곤 했다. 그러다 최근들어 새로운 옷에 대한 나의 사랑에 권태기가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부턴가 늘 입던 옷만 입고 자주 보던 쇼핑어플에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왜그럴까?
첫번째 이유는 나는 현재 직장 내외적으로 새롭고 멋진 옷을 입고 다닐 필요가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근무지는 면소재지에 있는 인구가 적은 조용한 곳이다. 또한 함께 일하는 동료수가 매우 적으며 외부 사람들과 대면하는 일이 많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동료가 적다는 것은 나의 옷차림을 보는 절대적인 사람 수 자체가 적다는 의미고, 직원 외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상황이 드물다는 뜻이다. 가끔 깔끔하게 차려 입는 날이면 동료들이 나더러 퇴근하고 소개팅하러 가냐고 물어보곤 한다. (실제로 소개팅이 있는 날도 있었다) 게다가 현재 여자친구가 없는 상태라 옷차림에 신경써야하는 부담이 작은건 확실하다. 만약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거나 여자친구가 있다면, 그녀에게 '너에게 잘보이고 싶고 이건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야'라는 신호를 주는 나의 옷차림에 온 열정을 쏟았을 것이다. 이처럼 현재 직장안에서나 밖에서의 나의 상황이 옷에 대한 관심을 줄어들게 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이유는 나의 재정 상황 및 목표 때문이다. 나는 공무원으로서 심각한 박봉을 받는 상황이다. 이런 낮은 급여수준에다가 적금, 주유비, 통신비, 생활비 등을 빼고나면 여유자금이 적을 수밖에 없다. 비록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있기때문에 숨만 쉬어도 지불해야하는 항목들이 적지만 몇 달 뒤 자취라도 시작하게 된다면 나의 재정상황은 더 숨쉬기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옷까지 주기적으로 구매한다면 나의 재정적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의 재정 목표를 어느 정도 구체화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내년이면 이제 30대의 나이가 시작된다. 이제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좋은 이성을 만나 결혼까지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당장 부채를 최대한 줄여서 나의 자금을 자산에 투자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산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 오를 가능성이 있는 재화이고, 그 반대말인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재화라고 한다. 그래서 부채임이 틀림없는 옷에 대한 사랑을 잠시 접고자 한다.
앞의 두가지 이유는 옷이 싫어졌다기보다는 옷에 관심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면, 세번째 는 진정으로 옷에 대해 관심이 줄어진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옷에 대한 본질 그 자체에 관한 내용이다. 그렇게 오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니 느낀것은 '생각보다 사람들은 본인의 옷에 신경을 더 쓰지, 타인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다'라는 것이다. 물론 옷차림이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을 좌우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단지 첫인상일뿐이다. 최종적으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옷을 아무리 멋지고 비싼 옷을 사도 결국 손이 자주 가는 곳은 부담없이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가진 비싸고 좋은 명품 옷들은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자주 선택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1년 365일중 특별한 날이 많지 않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바뀌고 나의 체형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어릴때는 조금 나의 개성을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는 튀는 옷을 좋아했다면 지금은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체형도 옛날에는 왜소하고 마른편이었는데 지금은 운동도 하고 식단관리도 해서 과거보다는 나름 체격이 커졌다. 이러한 이유로 자주 옷장에 있는 내용물들을 교체하면서, 기존의 옷은 안 입거나 못 입게 되어 몇 번 입지못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심각한 낭비임이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도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고, 그러한 사치스러운 옷을 구매해도 결국 편하고 부담없는 옷을 자주 찾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본인의 스타일과 체형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옷 구매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위의 내용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너무 옷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쓴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에서 옷차림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패션 TPO라는 용어가 있듯이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게 옷을 잘 입는 것도 사회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자금상황이 받쳐주지 않는, 또는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 및 체형이 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옷을 구매하는 것은 확실하게 반대라는 입장이다.
물론 본론에서 언급한 이유들은 시간이 흘러 나의 상황이 달라진다면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는 것들이다. 만약 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곳으로 발령이 난다면?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여성을 자주 보게 되는 상황이라면? 아니면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는 자산이 형성된다면? 또는 나에게 잘어울리는 스타일과 체형을 발견했고 유지한다면? 등의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가 옷을 구입하기전 '내가 지금 이 옷이 정말 필요한가?' '내가 이와 비슷한 옷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이 옷을 산다면 몇 번이나 입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습관이다. 이것은 비단 옷에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을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루에 깨어있는 동안 수 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어떤 선택은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린 선택이 나의 인생을 크게 바꿀 수도 있다. 작은 것이라도 무언가를 선택하기 전 잠깐이라도 나의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심사숙고를 하는 습관을 길러보도록 해보자. '그러니까 옷아, 우리 잠시 그만 만나자..상황이 바뀌면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