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색에 길들여진 시절

by Robin 임봉규


필름카메라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사진가들은 네 개의 브랜드 이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작업했습니다.

코닥, 후지, 코니카, 그리고 아그파였습니다.

지금처럼 디지털 프리셋이나 LUT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한 롤의 필름이 곧 사진가의 스타일을 결정하는 시대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필름의 색이 사진가의 감각과 미감을 규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코닥은 노란 상자로 기억됩니다.

이 노란색은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노랑·붉은 기를 품은 코닥 필름의 색감은 인물사진의 기준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피부톤을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표현해 주었기에

웨딩이나 가족사진을 찍는 이들이 코닥을 쉽게 떠나지 못했습니다.


후지는 초록 상자가 떠오릅니다.

초록과 파랑을 유난히 맑고 선명하게 재현하는 후지 특유의 감색은

일본식 청량한 색의 미학을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산과 바다, 숲을 찍는 풍경사진가들은 후지의 색 재현력에 깊은 신뢰를 보였고,

“후지로 찍은 풍경은 더 깨끗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였습니다.


코니카는 도시적인 쿨톤 감성이 짙은 필름이었습니다.

패키지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초록·파랑 계열이 주를 이뤘습니다.

색감도 차갑고 단정해 도시의 거리, 야경, 다큐멘터리 작업과 잘 맞았습니다.

따뜻함보다는 선명한 콘트라스트와 중성적 표현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코니카는 더없이 매력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아그파는 주황빛 상자로 기억됩니다.

유럽 필름 특유의 거칠고 따스한 톤을 지닌 브랜드였습니다.

현대적 선명함보다는 필름 특유의 그레인과 빈티지한 질감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

예술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작업에 더 잘 어울렸습니다.

그만큼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필름이었습니다.


당시 사진가들이 특정 필름만 고집했던 이유는 단순한 브랜드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사용한 필름의 색에 눈이 먼저 적응해 버렸고,

그 색감이 자연스럽게 ‘내 사진의 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후보정을 통해 색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필름 고유의 색이 작품 전체를 좌우했습니다.

익숙한 색을 떠나 다른 필름으로 넘어가면 “왜 색이 이렇지?” 하는

낯섦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수백 가지 디지털 필터와 프리셋이 존재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과거 필름 색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 시절의 필름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사진가의 시선과 감성을 만들어 준 ‘눈’ 그 자체였습니다.

필름 하나가 한 사람의 스타일을 완성시키던 시대.

그 아날로그의 유산은 오늘날의 사진 속에서도 여전히 깊고 조용하게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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