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시골의 한 작은 바비큐집에서 만난 전설

by Robin 임봉규


1994년 2월, 서른한 살이던 저는 생애 첫 해외출장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텍사스 포트워스(Fort Worth)에 있는 록히드마틴 본사였습니다.

두 주 동안의 긴 일정이었고, 하루는 협력업체 방문을 위해 애빌린(Abilene)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동하는 코스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출장 중에서도 가장 긴 이동을 해야 했던 날이었습니다.

포트워스에서 차로 세 시간 가까이 달려야 했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텍사스 서부의 평원은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함 그 자체였습니다.


애빌린에 도착한 뒤 협력업체를 둘러보고,

일행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을 찾았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외지인, 특히 동양인을 보기 드문 곳이었기에 문을 열자마자 식당 전체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습니다.


그곳은 Harlow’s Smokehouse,

시골의 주막 같은 분위기를 지닌 투박한 바비큐집이었습니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기 전이었지만 동네 노인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나 맥주 한잔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은 벽을 가득 채운 수십 장의 사진들이었습니다.

공군 조종사복을 입은 남자들, 전투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그리고 잔을 들고 웃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대학 시절 우연히 읽었던 척 예거(Chuck Yeager)의 자서전이 떠올랐습니다.


사병으로 미 공군에 입대해 장군까지 오른 전설의 조종사였습니다.

6·25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인류 최초로 음속 장벽을 깬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책 속에는 비행을 마치고 동료들과 작은 바에서 한잔하던 곳이 등장했는데,

눈앞의 풍경이 바로 그 장면과 정확하게 포개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일행 중 예거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저는 식당 주인에게 다가가 “예거 자서전에서 이 식당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 순간 주인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습니다.

“그래요? 그를 안다고요? 그 책을 읽었다고요? 예거가 여기 자주 왔죠!”

그는 마치 자신의 집안 영웅 이야기를 들은 듯한 표정으로

벽의 사진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를 낯설게 바라보던 노인들도

예거의 이름이 나오자 하나둘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정말 아느냐?”라고 물었고, 또 다른 이는 “그 사람은 진짜 전설이었다”라고 말하며

추억을 꺼내 놓았습니다.


포트워스 본사에서의 2주간은 기술과 수치, 일정표가 중심이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애빌린에서의 하루는 전혀 다른 시간이었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사서 읽었던 한 권의 책이 수년의 시간을 건너, 멀고 먼 텍사스의 시골 바비큐집에서 현실이 되어 저를 맞는 순간이었습니다.


80년대만 해도 길거리에서 카바이드 불을 켜놓고

철 지난 책을 파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그때 사서 읽었던 책 한 권이 이렇게 먼 훗날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출장 중 하루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그날의 공기와 바비큐 냄새, 벽의 사진들,

그리고 예거를 기억하던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는

지금도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돌아보면, 첫 해외출장에서 만난 그 하루가 제 삶의 여행 중 가장 특별한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자서전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저를 그 자리까지 이끌어 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여행의 진짜 가치는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이야기와 사람들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