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남고 의미는 가벼워집니다

경리단길에서 시작된 말의 여행입니다

by Robin 임봉규



서울에는 이름에 이야기가 담긴 곳들이 많습니다. 장충단은 제단이 있던 자리였고, 서빙고는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경리단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육군 중앙경리단이 있던 길이라서 그렇게 불렸습니다. 군 부대 앞 골목이 시간이 지나 카페 거리로 바뀌었을 뿐, 출발은 아주 현실적인 행정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가 완전히 비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국군재정관리단이 같은 위치에 계속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능과 명칭은 달라졌지만 군 재정 조직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경리단이라는 말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도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경리단길은 ‘군대 앞 길’이 아니라 ‘핫플 골목’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더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경주에는 황리단길이 생기고, 다른 도시에도 비슷한 이름이 하나둘 붙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경리단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름만 비슷하면 분위기도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 생겼습니다.


이쯤 되면 이름이 장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장소의 성격을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리단길’이라고 부르면 자동으로 카페, 골목, 감성, 사진 찍는 풍경이 떠오릅니다.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말이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뒤에 ‘게이트’를 붙이고, 일본에서는 무엇이든 ‘○○활’이라고 부르면 하나의 활동이 됩니다. 사람들은 긴 설명보다 짧은 패턴을 더 빨리 기억합니다. 말이 일종의 약어처럼 쓰이는 셈입니다.


요즘 많이 쓰는 ‘슬세권’, ‘붕세권’ 같은 말도 같은 흐름입니다. 원래는 역 근처를 뜻하는 ‘역세권’에서 나온 말인데, 이제는 슬리퍼 신고 갈 수 있으면 슬세권이고 붕어빵 파는 곳이 가까우면 붕세권이 됩니다. 뜻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형식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경리단길의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도시가 변하면 이름의 느낌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경리단이라는 말이 실제 군 조직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가벼워질수록 그 안에 있던 이야기도 함께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작은 호기심입니다. 이 길 이름은 왜 이렇게 불릴까 한 번만 떠올려 보면 됩니다. 그러면 카페 거리이면서도 군 재정 조직이 이어져 있는 장소라는 이중의 시간이 보입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리단길’은 계속 생길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가끔은 그 이름의 처음 뜻을 생각해 보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행어처럼 가볍게 불리던 골목도, 알고 보면 지금도 군 조직이 자리한 역사와 현재가 겹쳐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