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규정집보다 힘이 셉니다

by Robin 임봉규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전 회사 재직 시절의 일입니다. 일본에서 오래 생활하다 출장 온 동료와 점심을 먹기 위해 사무실을 나선 날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평범한 순간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몇 걸음 걷자 그 동료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야쿠자 아지트 같아요. 검은 차가 왜 이렇게 많죠?”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임원 차량 약 30여 대가 일렬로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검은색 대형 세단이었으며, 더 눈에 띄는 점은 임원 전용 주차구역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반 직원 주차 공간과 명확히 분리된 구역에 동일한 색상의 차량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보던 장면이었고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던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생활이 길었던 그에게는 그 풍경이 압도적인 위압감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묘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그날 이후 늘 무심코 지나쳤던 주차장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차고지가 아니라 조직의 질서와 권력 구조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임원 전용 구역이라는 물리적 경계는 지위의 차이를 일상적으로 각인시키고, 검은색 대형 세단의 행렬은 개인의 취향보다 집단의 위엄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자로 잰 듯한 차량의 정렬은 조직의 규율과 통제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 질서의 내부자였기에 그 의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은 그 풍경이 말하는 침묵의 언어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익숙함은 때로 가장 많은 것을 가려버립니다.


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각자가 익숙한 문화적 맥락의 차이에 있습니다. 압축 성장을 이뤄낸 한국의 대기업 문화는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강한 권위와 선명한 위계를 선호해 왔습니다. 권위와 질서를 외형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반면 일본 사회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에게는 위계가 존재하더라도 외형적 표현을 절제하는 문화가 익숙합니다. 지위는 존재하지만 드러내기보다 조화를 중시하는 환경에 익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질서로 보였던 장면이 그에게는 권력의 과시처럼 읽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같은 풍경이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된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장면은 특정 회사만의 특징이 아니라 한 시대의 조직문화였습니다. 고도성장기 한국 기업은 강한 리더십 중심 구조와 명확한 지위 체계, 권위의 시각적 표현, 질서와 통제의 강조라는 가치 위에서 운영되었습니다. 임원 전용 주차장은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관이 만들어낸 조직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차장이라는 일상의 공간에 당시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가 압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직은 텍스트로 된 규정집보다 일상의 풍경으로 자신을 더 명확히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회의실에서 외치는 혁신의 구호보다, 사내 규정보다, 주차장에 그어진 전용 구역의 선 하나가 조직의 철학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문화는 선언이 아니라 풍경으로 기록됩니다.


동료의 짧은 질문은 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질서들이 타인의 시선에서는 전혀 다른 무게로 보일 수 있다는 통찰을 남겼습니다. 검은 세단이 즐비했던 그 주차장은 이제 제 기억 속에서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한 시대의 가치관이 머물렀던 하나의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오늘의 풍경들은 훗날 어떤 시선으로 다시 읽히게 될까요. 조직은 언제나 자신이 믿는 가치를 가장 평범한 풍경 속에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