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비릿함과 달콤함의 침식 사이.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숭고함.

by 송대근

​전남 영광에 도착한 시간은 토요일의 이른 아침이었다.

차창 밖 풍경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뿌연 안개에 잠겨 있었다. 이번 걸음은 출장이라는 건조한 명분이 있었지만, 낯선 터미널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다시 산책자가 된다.


목적지는 늘 지도 위에 구체적인 점으로 찍혀 있으나, 나의 발걸음은 대개 그 점을 비껴간 쓸모없는 방향으로 먼저 향하곤 했다. 그것이 내가 도시를 편향되지 않게 온전히 읽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터미널 근처의 낡은 목욕탕이었다. 밤새 달려온 피로를 씻어내면서도, 그 지역의 내밀한 온도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탕 속에 몸을 깊게 담그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증기가 낮게 깔려 시야를 흐렸다. 한 시간 동안 욕탕 안에서 마주친 청년층은 한두 명뿐이었고, 대부분은 세월의 궤적을 몸 위에 훈장처럼 새긴 장년과 노년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신사에게 등을 맡기며 나직한 사투리로 안부를 묻는다. 탈의실에는 요즘 보기 힘든 구두닦이와 이발사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TV 소리가 느리고 묵직하게 흘렀다.


그러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욕탕은 무척이나 적막했다. 젊음의 뜨거움을 수증기가 대신 채워넣고 있었다.

어쩌면 도시의 진짜 나이는 관공서의 통계 수치가 아니라, 이 축축하고 뜨거운 욕탕 안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영광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심이라 부르기에 간판들은 너무 낡았고, 시장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터미널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굴비를 말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그것은 환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이곳이 굴비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냄새는 노골적이고 지독하리만치 성실했다.


​어느 가게 앞에서는 떡을 찌는 수증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김이 새어 나오는 찜통은 마치 이 도시의 마지막 심장 박동을 알리는 작은 굴뚝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유구한 냄새의 틈바구니로 낯선 풍경 하나가 끼어들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에는 두쫀쿠라는 광고가 선명했다. '두바이 쫀득 쿠키'의 줄임말이었던가. 없어서 못 판다던 그 두쫀쿠가 이제 영광굴비의 자리마저 넘보나 보다.


​달콤하고 인위적인 이름은 비릿한 굴비 냄새와 기묘하게 충돌했다. 수십 년간 이 골목을 지배해 온 생선의 비린내가, 이제는 세련된 폰트와 파스텔톤 광고에 은밀히 밀려나고 있었다.


자본의 논리가 침투하지 못한 골목의 끝자락까지 들어온 이 현대적인 언어는, 마치 이 도시가 더 이상 굴비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듯해 묘한 서글픔을 안겼다.


​도시의 풍경을 활력이 넘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상가의 셔터는 대부분 올라가 있었지만, 물건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진열대 위에서 박제되어 가고 있었다. 주인들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텅 빈 거리를 응시했다. 시장은 열려 있었으나 시간은 어딘가에 걸려 멈춰 있었다.


​나는 투박하게 경사진 지하상가 계단을 내려갔다. 노인들도 이 계단을 타고 내려올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설 만큼 가파른 길이었다. 공기는 일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국밥, 족발, 순대를 파는 점포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금요일 오후임에도 문을 연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한 가게에서는 TV 예능 프로그램 소리가 상가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크게 터져 나왔다. 주인은 장사에는 이미 뜻이 없는 듯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손님이 들어와도 반가운 기색 없이 느릿하게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그중 한 곳에서 피순대와 족발을 포장했다. 계산대 위에는 수만 번의 손길이 지나간 듯 세월이 눌어붙은 얼룩이 가득했다. 비트코인으로 결제되는 시대에도 구형 카드 단말기는 통신망과 어렵게 교신하며 느릿하게 승인 신호를 보냈다. 비닐봉지에는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졌지만, 그 온기마저 이 지하의 냉기를 이기기엔 버거워 보였다.


​숙소로 돌아와 포장을 풀었다. 피순대는 검붉은 속을 투박하게 드러냈고, 족발은 기계로 썬 듯한 매끈함 대신 칼맛이 느껴지는 거친 단면을 뽐냈다. 도시의 프랜차이즈에서 흔히 맛보던 표준화된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속물 특유의 큼큼한 향이 은근하게 배어 있었고, 씹을수록 이 동네의 거친 공기가 함께 섞여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콩나물 대가리에는 간혹 뼛가루 같은 단단한 티끌이 섞여 나왔다.


맛은 결코 세련되지 않았지만 정직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놓인 맛. 그것은 영광터미널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이 투박한 풍미를 느끼며, 나는 이 도시가 버티려 애쓰는 지속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번영은 아닐지라도,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들의 숭고함에 대하여.


​다시 거리로 나오니 팬데믹의 유산인 선별진료소가 아직 철거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낡은 단지 너머로는 새로 지은 아파트만이 이질적인 높이로 솟아 있었다. 베란다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네 발 자전거도 보였지만, 골목 어디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공가를 마주 보고 선 신축 교회는 유난히 매끄러운 외벽을 자랑하며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떠나가고 집은 허물어져 가는데, 믿음의 공간만은 가장 먼저 새 옷을 갈아입는다. 어쩌면 이 거탑은 노인들에게 병원보다도 절실한 곳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병원보다 종교가 더 의미 있을 것이기에.


건너편 길가에 걸린 ‘폐기물 투기 금지’라는 현수막 바로 밑에는 쓰레기봉투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금지의 문장은 언제나 현실보다 선명하고, 도시는 늘 그렇게 말과 풍경이 어긋난 채로 존재한다.


​나는 터미널 앞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의 짐은 대부분 단출했다. 작은 가방 하나, 혹은 장바구니 하나. 이 도시는 누군가를 붙잡아두기보다는, 천천히 소화시켜 떠나보내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다.


​영광터미널의 하루는 특별할 것이 없었기에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활기가 넘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멈춘 것도 아니었다. '두쫀쿠' 같은 달콤한 유혹과 '비릿한 굴비 냄새'라는 숙명 사이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짓고 장사를 하며 떠나갈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다시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떠나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는 언제나 조금 쓸쓸하다. 하지만 그 쓸쓸함이야말로 인위적인 포장을 벗겨낸 도시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목적지를 향해 다시 이동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코끝에 남은 굴비의 잔향과 지하상가에서 느꼈던 피순대의 온기는 꽤 오랫동안 내 기억 속을 산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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