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31살 - 이직, PAN HORIZON

어쩌면 운명이었을 우리.

by 송대근
넌 더 힘들게 기다리잖아


하선 후 저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존에 타던 카캐리어에서 선종을 변경하려고 했는데요, 벌크라고 하는 원자재 운반선으로 변경하기 위해서 이직자리를 찾게 되었죠.


이때 약 8개월 간 의도치 않게 쉬게 됩니다.


하지만 돈을 벌지 못해 조급해지기보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여자친구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배를 타느라 일 년에 만나는 시간이 며칠 되지도 않으니, 이런 장기휴가 때 여자친구의 일정에 전적으로 맞춰 오랜 시간을 보내야겠다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이때 여자친구와 여행도 많이 갔습니다.


많은 추억을 만든 가운데, 제가 여자친구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배를 타는 동안 기다리는 게 힘들지 않으냐 물은 적이 있습니다.




배 타는 거 기다리는 거, 힘들진 않아?

글쎄, 나보다 네가 더 힘들잖아.

내가?

어. 나는 육지에 있으니까 스트레스 풀 방법도 있고 친구들이랑 놀러 갈 수도 있는데 너는 배에 갇혀있잖아.

나도 널 보고 싶긴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서로 마찬가지잖아?

힘들면 네가 더 힘들지 내 걱정할 건 아닌 거 같은데?



맞는 말인데, 상대로부터 배려심이 가득한 말을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여자친구가 매우 멋있는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시선에서 생각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 평생을 함께 지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돌이켜보면 동료선원들의 연애사를 들어보아도, 만나지 못해 힘들다며 헤어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못 봐서 힘든 건 선원들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게 선원의 잘못인 것처럼 되는 걸까요? 선원인걸 모르고 연애한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결국 기본적인 배려심의 차이겠지요.

제 여자친구는 마음에 여유가 있는 거고요.


그렇게 몇 년 내로 결혼을 약속하고 저는 다시 승선을 하러 갑니다.





이번에 타게 된 배는 PAN HORIZON 호, 석탄운반선입니다.

호주, 인도네시아 등지로부터 석탄을 공급받아 한국의 화력발전소에 공급하죠.


화력발전소나 석탄채굴장은 대부분 기피시설이다 보니, 카캐리어처럼 대도시에 입항하는 경우는 없고 대부분 외각지에 입항하기 때문에 상륙 나가서 놀 만한 거리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한국에서 경도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시차가 ±2시간 내외인 것도 큰 장점이지요. 카캐리어 같이 한국에서 유럽을 가는 배들은 시차가 심하기 때문에 적응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또 카캐리어 들은 수많은 자동차들을 실어 이곳저곳에 나르기 때문에 그만큼 선원들이 피곤해지는데요, 이런 석탄운반선은 호주에서 석탄을 다 받아 한국 발전소에 다 퍼내려 주기 때문에 입항 항구가 소수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는 장점이지요.


카캐리어를 타면서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더니, 이제는 그냥 일 편한 배를 타고 싶어진 겁니다.

사람이 참 간사하지요.


배의 종류가 바뀌어도 선박기관사의 업무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배에 싣는 짐이 좀 다른 것이지 엔진은 대동소이하거든요. 그래서 이직도 쉬운 편입니다. 이직해서도 업무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이직한 회사에서 처음 왔으니 배려해 주어서 컨디션이 좋은 배에 배승해 주었거든요.


하지만 휴직이 너무 길어서인지, 이 해에는 약 2000만 원 정도밖에 모으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전 화에서 결정한 자동매수 투자는 월급 들어오는 데로 이어나갔죠.


그 결과는?



31살 순자산 1억 1천

네, 드디어 1억을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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