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약속
나랑 10년 고생하자.
Kolt 호에서 하선하고, 저는 여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혼준비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준비할 게 많았습니다. 프러포즈, 상견례, 스드메, 식장준비, 청첩장 모임, 피로연, 신혼여행, 친인척 인사까지... 결혼 스케쥴러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저의 결혼은 간단했습니다. 양가 예물 생략, 결혼식 생략, 직계가족만 모시고 상견례 진행, 친인척 인사 생략, 신혼여행은 베트남 자유여행, 신혼집은 아내 직장 근처 월세. 혼수가전은 작은 사이즈로. 침대 대신 매트리스.
월세 보증금 2천에, 기타 비용은 천만 원 수준으로 정리됐습니다.
대체로 이런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저는 평생에 한 번뿐인 호화로운 결혼식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생에 한 번뿐인 신혼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지도 않았고,
평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을 호화휴양지로 가고 싶지도 않았고,
평생에 한 번뿐인 신혼집을 든든한 전세, 자가로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평생에 한 번뿐인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금은 참아야 했습니다. 사실, 검소함이 습관 되어 그다지 참는 걸로 느껴지지도 않긴 합니다. 애초에 정말로 그럴싸한 멋진 생활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마트에 가면 항상 할인코너로 갑니다. 30% 세일 붙은 상품을 보며, 오늘은 이걸로 뭘 해먹을지 고민합니다. 원하는 상품이 없으면 그냥 집으로 돌아옵니다. 빈손으로 오는 날도 꽤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집에 먹을 건 남아있으니까요.
저는 괜찮은데, 문제는 아내였습니다. 저와 결혼한다면 아내도 그런 생활을 원할지,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습니다.
무턱대고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고 따르기 싫으면 떠나라,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태도죠. 그래서 저는 결혼 전 저의 인생계획을 아내에게 설명합니다.
... 이렇게 해서 40대 초반까지 10억에서 12억 가량 모으고, 조기은퇴 하는 거야. 은퇴 후에는 동남아시아를 돌면서 살고.
최악의 경우는 어떤데?
최악의 경우는 50대 초반까지 배를 타야겠지만, 계획대로라면 40대 초반에는 목표에 달성할 거야. 지금까지 진행된 결과도 괜찮고.
그래. 그럼 난 50대까진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야겠다. 그래야 늦춰져도 실망하지 않지.
그래, 그럼 나랑 10년 고생하자.
이렇게 아내는 제 계획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결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됩니다. 마치 작전투입에 앞서 준비하는 군인처럼, 10년이라는 대장정을 준비하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사전에 모든 계획을 준비했으니 실행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대부분 결제만 앞둔 상황이었으니까요.
낭만적인 프러포즈도, 아름다운 결혼식도, 거실을 장식할 웨딩사진도, 그 흔한 결혼반지도,
그러나 우리는 달콤한 신혼생활을 알콩달콩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다시 일할 시간이 찾아옵니다.
이번에 승선할 선박은 철광석 운반선, SEA CAOFEIDIAN 호입니다. VALEMAX라고 불리는, 현존하는 벌크선 중 가장 큰 사이즈입니다.
당시 LNG선의 로테이션 문제가 있어서, 저는 LNG 화기사에서 잠시 벌크 일기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급여는 100만 원가량 깎이게 되었지만 LNG로 가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죠.
이 배는 브라질과 중국을 항해합니다.
브라질에서 철광석 선적이 끝난 배는 중국으로 출항하는데요, 이 항해는 약 1.5개월로 꽤 긴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도착할 때쯤 되면 신선한 채소 등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탄 배 같은 경우는 그래서인지 상추를 키워드시더라고요.
한국에서 브라질이 상당히 멀다 보니, 보통은 중국에서 교대하게 되는데요. 이때는 전임자 일기사님의 사정으로 브라질에서 교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네, 그렇게 저는 한국에서 브라질로의 출근길에 오르게 됩니다.
38시간 이코노미석의 고문(?)을 받으며 브라질로 날아갑니다. 마침 중간 경유지가 카타르 도하공항인지라 구경할 거리는 많았습니다.
지긋지긋한 기내식과 뻣뻣해진 허리를 최대한 보호해 가며 Caofeidian 호에 도착합니다. 배에 도착한 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승선하고 곧 출항하게 되는데,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배가 워낙 크다 보니 끄떡없긴 하더라고요.
이 배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습니다. 업무강도는 괜찮았는데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거든요. 한국인 부원과 필리핀인 부원 사이의 문제, 한국인 부원 간에 문제, 한국인 사관들 간의 문제...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있다 보니, 일단 당장 승선하고 있는 동안은 억지로 봉합해서 같이 태우는 심정이었죠.
제 경험상 배 컨디션이 좋으면 선원 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배 컨디션이 나쁘면 선원 간에 문제는 잘 없습니다.
아마 일이 너무 많으니 서로 해코지할 생각도 안 드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요. 어떤 게 더 나은지는 뭐라 대답을 못하겠네요. 두 경우 다 무척 힘듭니다.
어쨌거나 배에서의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저의 투자방식은 바뀌지 않습니다. 매월 450만 원씩 주식에, 150만 원씩 예적금에 투자합니다.
해운업은 호황이 계속되어 성과급도 나쁘지 않게 나왔고요.
그렇게 투자자산을 계속 늘려가면서 현금자산 또한 8천만 원 확보가 됩니다.
마침 이 해도 상승장이 펼쳐져서 기대이상의 수익률을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34살 순자산 4억 5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