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서른다섯, 마흔다섯 수의 상처
나는 세 딸 중 엄마에게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런 보석 같은 딸이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엄마의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산후조리 이후 울고 싶을 때에도 엄마에게 갈 수가 없었다.
첫째는, 엄마에게 미안해서였고,
둘째는, 사위를 미워하게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조금씩 커가며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분가 후 나는 밥상을 두 개씩 차려야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손으로 음식을 집으면 등 긁게로 손등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어 나는 아이의 밥상과 남편의 밥상을 따로 차렸다. 분가하는 과정에서도 상을 엎어버리는 폭력성이 드러났고 어느 날 말다툼을 하다 나의 목을 잡고 침대에 내동댕이 치는 일이 생겼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화를 내다 내가 던진한마디에 더 크게 화를 낸 것뿐이었다.
두 번째 폭력이 생겨난 건 돈문제로 싸움이 있으면서였다, 말로는 무서워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는 언제나 편지로 대신했다.
학원에서 받은 급여를 본인통장으로 들어오게 하라는 말에 싫다 소리를 할 수가 없어 급여를 거짓말하고 통장으로 들어오면 30만 원을 빼고 다시 남편 통장을 넣었다.
결혼을 하고 막아야 할 돈이 부족해지면 돈을 알아서 하라 이야기하고 돈을 메꾸고 나면 다시 가져가는 남편 때문에 나의 삶은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작은 과자 하나도 사주기 불편해진 나는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간 작은 거 하나 빠지지 않고 기록해서 남편 앞에 내놓았고 그건 식칼을 꺼낼 정도의 일이 되고 말았다.
학원에 입사하고 나면 원장하고 맞지 않아 그만두었고 동업으로 교습소를 하겠다고 시작을 했지만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맞지 않는다며 혼자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교습소의 매출이 올라가며 나는 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짜증과 화가 늘어나 나는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작게 시작되어 두 번, 세 번이 되어가는 남편의 폭력성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혔고 학원일을 하다 알게 된 동생의 부산 어머님 댁으로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혼을 해야 할까? 서울에 가면 엄마에게 가야 할까? 고민을 하며 며칠이 지나갔다. 그때 이모님이 내게 하신 말씀은 “네가 남편을 고쳐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봤니? 최선을 다해보고 그래도 후회가 없을 때 하는 게 이혼이다!”라고...
나는 어떤 노력도 해보지 않았다. 그냥 무서워만 했을 뿐!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다 마음먹었지만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일이 터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아이소리에 남편이 깰까 봐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업히지 않고 신발을 신고 걷겠다고 보채는 아이의 소리에 남편은 잠이 깨서 또다시 등 긁게를 손에 들었던 것이다.
아이가 맞을까 봐 끌어안은 내게 발길질을 하며 폭력을 행사하던 그 모습은 아직도 맘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길로 아이를 데리고 나와 시장을 한 바퀴 돌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판단에 친정집으로 갔다.
이틀쯤 지났을까? 엄마는 이야기하셨다.
“이제 그만 집에 가!”
“엄마! 나 갈 수가 없어! 그만 살고 싶어!”
집 나갔던 이야기부터 그동안의 일들을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엄마는 나를 때려가며 대성통곡을 하고 우셨다. 너무나도 아팠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 엄마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도는 것 같아 목이 메고 눈물이 난다.
손주보다 딸이 더 중요한 나의 엄마!
이혼을 결심하고 나오게 된 시기는 내 나이 28세였고 아들이 11월 생이라 두 돌도 안된 시기였다. 아들과 함께 집을 나와 있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까? 엄마는 울고 또 울었다. 다섯 식구 중 자신의 감정에 가장 충실한 엄마는 분가하는 과정의 전세금으로 친정에서 빌려간 돈을 회수할 생각도 없었고 아마도 손주의 인생이 아닌 아직 서른도 안된 내 딸의 인생을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 엄마는 “일어나~”라고 이야기하고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내 얘기만 들을게 아니라 남편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며~
도착했을 때 남편은 잠을 자고 있었다.
어려서였을까? 폭력 때문이었을까?? 나는 몇 번 안 되는 폭력에도 남편과 마주하기가 많이 힘이 들었고 엄마와 동행을 하는데도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데....
매일 맞고 사는 여자들은 대체 숨을 쉴 수나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숨을 크게 쉬고 들어간 집에서 남편이 핑계라고 하는 말들이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나이가 들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생각이 읽히는 걸 보고 엄마도 그때 남편의 말이 거짓말들 이란걸 다 알고 계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