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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Nov 19. 2015

검은 사제들

익숙한 것들을 변주하다

어릴 적에 본 ‘엑소시스트’는 색다른 충격이었다. 당시에 내가 ‘전설의 고향’을 통해 봐 왔던 귀신들은 처음엔 무서웠지만, 알고 보면 억울한 사연이 있어 동정을 보낼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엑소시스트’에 등장하는 악령은 차원이 달랐다. 그 자체가 절대악인 악령은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 저주의 방언을 쏟아 내며 온갖 기행을 저질렀다. 그 불경스러운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죄를 짓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또한 영화 속 악령이 내 몸속으로 타고 들어올 것 같아서 찝찝하고 두려웠다. 눈을 감으면 기괴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한동안 고생했었다. 엑소시즘이라는 초자연적인 신비 현상은 어린 나에게 그런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검은 사제들’의 시놉시스를 보고 든 생각은, 과연 “‘엑소시스트’가 주었던 충격을 넘어서는 새로움을 보여 줄 수 있을까?”였다. 그런 의구심을 안고 영화를 본 후에 느낀 재미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오는 것이었다. 익숙한 소재들의 또 다른 변주. 거기서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서양의 엑소시즘을 한국을 배경으로 행하면서 우리 무속의 구마 예식까지 곁들여 보여 주고 있다. 동서양의 구마 예식을 한 자리에서 보는 것이 흔한 경험은 아닌 만큼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구마 예식을 행하면서는 가톨릭에서의 구마 절차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재현한 것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사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영화의 많은 부분을 구마 예식에 할애할 수 있었던 것은 인물들의 캐릭터 형상화 과정이 배우들의 평소 이미지 덕에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독불장군 문제아. 이전 필모그래피에서 획을 더해 가며 쌓아 온 배우 김윤석의 이미지가 '김 신부'라는 인물에 그대로 투영되면서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캐릭터가 형성되었다.  '최 부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순수하지만 각성 이후에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의 캐릭터는, 강동원이라는 배우가 지닌 양면적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이렇게 흥행 배우들이 이제까지 자신들이 연기해 왔던 캐릭터를 가지고, 조금은 낯선 소재의 이야기를 하는 데서 익숙하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익숙한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였다. 거대한 악이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회. 악이 존재함을 알지만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기득권 집단과 자신의 한몸을 희생해서라도 악으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려는 의인이 공존하는 사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사회의 모습이 악령과 사제의 대결 뒤에 깔려 있었다. 구마 예식 중에 악령의 꾐에 넘어가 엄청난 내상을 입고 도망쳐 나온 최 부제의 고통스러운 모습은 번화가 속의 웃음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이 극명한 대비는 주변에 만연해 있는 악에 둔감한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듯해 씁쓸했다. 그리고 김 신부를 대하는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교단의 태도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변질된 의미로 기능하는 사제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성서에는 제사장이 자기 자신을 바치거나 자기의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낸 이야기들이 많지요.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바쳤습니다. 그러한 제의식은 결국 예수에 와서 완성됩니다. 그는 자기 몸을 바쳐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가장 큰 제사를 치르게 되고 인류의 제사장이 됩니다. 그게 바로 사제의 길이지요. 우리 현실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들의 사제는 자신을 제물로 바칠 생각은 않고 다른 데서만, 그것도 약하고 힘없고 한스럽게 살아온 민중들에게만 요구합니다. 더구나 가증스러운 것은 그러한 폭력을 자행하면서도 민중이 역사의 주체 운운하면서, 그들을 현혹하여 기꺼이 제물이 되기를 부추긴다는 사실입니다.”
-현길언, '사제와 제물' 중에서


부마자인 소녀를 희생시켜 악령을 퇴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악령으로부터 소녀를 구해 낸 김 신부.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끝내 험난한 구마 예식을 다 치르고 자신의 몸을 강물에 던져 희생함으로써 사제의 의무를 다하는 최 부제.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가는 참사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영화의 변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작은 감동이었다.


잠깐의 감동이 지나간 뒤에 드는 의문 하나.

호러 영화의 내용이 현실이 되는 것이 더 끔찍할까, 영화에 있는 참사제를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더 끔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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