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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an 05. 2016

헤이트풀 8

밀실에 갇힌 증오의 끝

술자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인생의 고민을 나누거나 술 자체를 음미하는 조용한 자리가 있는가 하면, 왁자지껄하게 속에 것을 모두 쏟아놓는 자리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을 선호한다. 허름한 대폿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욕지거리도 주고받으며 일상에서 감춰 왔던 모습들까지 마음 편히 내 보이는 자리.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영화에서도 그런 맛을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을 볼 때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8번째 작품 ‘헤이트풀 8’은 눈보라를 피해 산장에 모인 8명의 생사를 건 심리전을 다룬다. 인물들은 제목처럼 혐오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얽히고설켜 팽팽한 긴장감과 폭발하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런 갈등의 고조 사이에 감독 특유의 위트 있는 대사가 쉼표처럼 배치되어 호흡을 고르게 한다. 그리고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서부극 특유의 풍취를 돋우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울트라 파나비전 70으로 촬영된 광활한 설경 위에서 멋진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공포스러울 만큼 생생하게 촬영된 눈보라의 풍경은 산장 속 밀폐된 공간에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을 응축시킴으로써 감정의 폭발력을 배가시킨다. 사소한 자극에도 방아쇠가 당겨질 것 같은 긴장감. 2시간 47분의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레드 락 타운으로 여죄수 도머그(제니퍼 제이슨 리 분)를 이송해 가던 교수형 집행인 존 루스(커트 러셀 분)는 설원 속에서 우연히 현상금 사냥꾼 워렌(사무엘L. 잭슨 분), 보안관 매닉스(윌튼 고긴스 분)와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거센 눈보라를 피해 산장으로 들어선 4명은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또 다른 4명, 연합군 장교 샌포드(브루스 던 분), 이방인 밥(데미안 비쉬어 분), 리틀맨 오스왈도(팀 로스 분), 카우보이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 분)를 만나게 된다. 큰 현상금이 걸린 죄수를 빼앗기게 될까 봐 염려가 된 존 루스는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경계하는 인물들의 증오심이 점점 선명해지고, 독살 사건을 계기로 불안함과 의구심이 최고조를 이루게 된다. 인물들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극한 대립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답게 갈등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어김없이 잔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드고어물에나 어울릴 만한 장면들이 자주 나오지만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섞는 욕설이 친근감의 표시로 느껴지는 것만큼이나 이 영화의 유혈씬은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날것으로서의 숨김없는 인간 욕망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쌓인 인물에 대한 분노를 일시에 잔혹한 이미지로 치환하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후련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막다른 길에 이른 갈등의 정점에 총과 칼로 출구를 만들었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다양한 기능을 하는 자극적인 장면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저급한 싸구려 영화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이야기 전면에 녹아 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과 지적인 유머가 살아 숨 쉬는 대사들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눈보라 치는 세상과 산장 안이라는 공간의 대비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가 느껴졌다. 특히 요즘의 우리 상황을 우의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아 씁쓸했다. IS의 끝없는 테러.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세계 경제의 위기. 해소는커녕 더 심해지기만 하는 빈부의 격차. 이상 기후에 몸살을 앓는 지구촌. 나라 밖 세계에는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있다. 그나마 안전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산장 안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서로 혐오하기에 위태롭다. 자본, 이념, 세대, 성별의 큰 축으로 편을 가른 채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는 우리들. 우리는 과연 눈보라가 그친 그 어느 날에 산장 문을 열고 눈부신 햇빛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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