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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Dec 26. 2015

대호

더 가지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대결

인간은 동물이다. 보통의 동물들과는 다르게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의 목적이 자기 욕망의 충족에 있을 때, 인간은 ‘금수(禽獸)만도 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종족들의 씨를 말려 놓기도 하고, 같은 종족을 해하기도 한다. 서로 어울려 살아가던 자연의 질서는 파괴되고, 더 가지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갈등만이 더 커져 간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대호’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이기적인 폭력성과 숭고한 가치를 지키려는 인간의 의지가 벌이는 대결을 섬세한 시각적 효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이다. 일본은 근대화를 빌미로 조선에 발을 들여놓고 급기야 군사력을 발동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들을 핍박하고, 조선에서 나는 것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순식간에 조선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위기를 맞은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생활환경을 개선한다는 미명 하에 호랑이 구제 사업을 벌인다. 일본군들의 이동 시 사고를 줄이고, 진귀한 맹수의 가죽을 얻으려는 욕망은 조선 맹수들의 씨를 말려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의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 분)는 지리산 호랑이 대호의 가죽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장교 류(정석원 분)를 다그친다. 류는 조선인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더욱 대호 사냥에 집착한다. 류의 하수인 구경(정만식 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주 악랄하게 대호를 사냥한다. 이 두 사람은 가지려는 자의 힘에 순응하면서 동족과 자연을 배반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횡포에 조선의 자연은 파괴되고, 조선인들의 삶은 총포 앞에 놓인 사냥감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대호를 잡는 일이 어려워질수록 류는 전설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분)을 찾게 된다. 하지만 천만덕은 류에게 협조하지 않는다. 산에서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대호를 잡는 일은 그 도리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경이 대호의 가족을 몰살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도 천만덕은 “그 정도 했으면 됐다. 그만해라.”라는 말을 조용히 흘린다. 더 이상의 욕심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만덕은 욕망에 눈이 멀게 되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생기는지를 몸소 체험한 자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의 일원으로서 순탄하게 살기 위해서는 산의 도리, 즉 자연의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류의 협박과 구경 일행의 설득에도 천만덕이 다시 총을 잡지 않은 것은 그런 믿음의 결과이다.


하지만 마에조노와 구경의 욕망이 대호와 지리산을 모두 집어삼킬 상황이 되자 천만덕은 다시 총을 집어 든다. 더 가지려는 자들이 자연의 시신을 얻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끝까지 자연의 순리라는 가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하더라도 자주민으로서의 조선인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처럼...


이처럼 이 영화는 일본이 조선을 억압하는 양상과 인간이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을 병치하여 인간 욕망의 실체를 웅장한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욕망하는 자와 그 욕망에 순응하며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자, 그 모든 욕망으로부터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치를 지키려는 자. 이들의 대결을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실사처럼 생생한 CG를 통해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호흡이 뒤로 갈수록 지리산 산자락만큼이나 길고 무거웠는데, 엔딩신이 작품 전반에 쌓여 온 무게를 모두 안고 투신하는 듯해서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이 내 가슴속에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머릿속으로는 새로운 차원의 생각과 질문들이 쏟아졌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조선이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순리를 어기고 마구잡이로 빼앗고 거둬들인 성과로 우리는 무엇이 얼마나 발전했다는 말인가? 그 과정에서 위험하고 단순한 허드렛일에 투입된 우리들이 배우고 얻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때에 사라진 것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결핍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고 조화와 균형을 깨 버린 결과로 늘 굶주린 욕망의 갈증만 심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먹고살 길이 막막한 아이들이 세상의 서푼짜리 유혹에 넘어가 처절하게 이용당하는 시대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영화의 화면 속에 널브러진 욕망의 껍데기들을 보고도 우리가 잃은 것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는가? 천만덕이 끝끝내 당신들로부터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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