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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26. 2016

부산행

재난 속에 비친 우리의 삶

가끔씩 지방으로 출장을 간다.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 기차를 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모처럼 짧은 여행을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설렘은 KTX 열차를 타면서 사라진다. 엄청난 속도. 창밖의 세상은 선으로 늘어지며 휙휙 지나간다. KTX 열차는 목적지까지 빠른 시간 안에 데려다 주지만, 기차여행의 낭만을 앗아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머릿속으로 창밖의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뿐이다.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오직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KTX 열차.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주위의 풍광이나 타인들의 삶을 바라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 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김광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이처럼 속도감에 몰입하여 이웃들과 단절한 채 소중한 가치를 잃고 살아가는 비인간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에서 비판하고 있다. 거대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 버린 현대 사회. 그 속에서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이웃들과 경쟁하면서 상위 계층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산다. 그럴수록 빈부 격차는 더 커져서 탐욕이 낳은 사회적 재난의 희생자들은 늘어만 간다. 이 희생자들을 ‘부산행’에서는 ‘좀비’로 형상화하고 있다.

    

‘zombie(좀비)’는 원래 서아프리카 지역의 부두교(voodoo cult)에서 뱀처럼 생긴 신(snake-god)을 가리키는 말로, 콩고어로 신을 뜻하는 ‘nzambi’에서 나온 말이다. 이후 일부 아프리카·카리브해 지역 종교와 공포 이야기들에 나오는 되살아난 시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고, 비유적으로 반쯤 죽은 것 같은 무기력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사람을 물면 물린 사람도 괴물이 되는 좀비는 1968년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 감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Day of The Dead)’에서 캐릭터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런 좀비에 대해 문강형준은 다음과 같은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좀비 서사에서 좀비가 흔히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면서도 사물로 변해 버린 노동자의 형상은 좀비와 닮았다. 자본주의하의 노동자는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다.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고, 노동하기 위해 소비하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좀비는 또한 쇼핑몰을 배회하는 소비자로 그려진다. 쇼핑몰은 해방감을 선사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또 다른 억압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 좀비는 여전히 노예다. ······ 그런 점에서 좀비는 현대인의 거울상이다. 좀비를 뜻하는 ‘살아 있는 시체’라는 표현이 애초에 니체가 인간을 묘사했던 말에서 온 것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문강형준, ‘좀비, 우리의 거울’, “한겨레”, 2012년 2월 4일.


‘부산행’에서 좀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상황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연약한 속살을 드러낸다. 시스템이 재난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지 못하니까 개인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만 몰두한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부산행’은 사회 각 층의 인물들을 열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모아 놓고 재난에 대응하는 인물들의 양상을 조명하고 있다. 펀드매니저, 상남자, 임신부와 노인, 10대 아이들, 자본가, 기장과 승무원 등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살아남고 함께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펀드 매니저 ‘석우(공유 분)’는 거대 자본에 충실한 엘리트다. 자신의 행위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부의 지시대로 행동한다. 더 큰 실적을 올려서 실력을 인정받고 상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에게 큰 가치일 테니까. 그 목표만 보고 달리다 보니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딸에게조차 무신경하다. 딸이 소중하긴 하지만 머리로만 챙긴다. 딸의 마음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교감에 들일 시간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딸의 생일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오르게 된 KTX 열차는 그의 성격이 변모하는 공간이 된다. 사무실 속에서 그는 희생자를 만드는 가해자였다. 높은 곳에서 자신이 벌여놓은 재난의 현장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KTX 열차 안에서 그는 재난의 대상자가 된다. 재난이 본인의 문제가 되자 그는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들과 힘을 합치게 된다. 처음에는 오직 자신과 딸만을 챙겼지만, 타인의 도움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딸의 안전을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는 변했다. 이와 같은 석우의 변모는 인간 본연의 가치 회복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 이웃과 함께 어울려 서로를 위하는 삶. 그것에서 너무 멀어진 우리에게 석우는 ‘그래선 안 된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상화(마동석 분)’는 이 시대의 결핍이 만들어 낸 이상형의 인물이다. 가족을 살뜰히도 챙기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며 약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힘도 세고 싸움도 잘 해서 좀비들로부터 사람들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혹시라도 구정물이 튈까 봐 불의에 눈 감고, 약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이 시대 일부 남성들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부산행’을 본 관객들이 유독 마동석의 연기를 칭찬하는 데도 상화의 캐릭터가 기여한 바가 크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용석(김의성 분)’의 야비함을 욕한다. 저 혼자 살겠다고 주변 사람들을 처럼 팽개치는 용석의 행동은 분노를 넘어 측은한 마음까지 느끼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후에 우리는 유가족을 보듬어 안고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보다는 내 자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데 몰두했다. 메르스가 유행할 때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역 마스크를 사재기했다. 사드 배치 지역이 발표된 이후에는 해당 지역의 시위 현장을 뉴스로 보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그런 우리가 용석과 다른 점은 뭘까? 이기적인 캐릭터가 재난 영화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요소이긴 하지만, 아비규환의 현실 탓인지 ‘용석’이라는 양념은 특히 더 자극적이었다.

     

열차 안 인물 중 가장 노령자인 ‘인길(예수정 분)’은 이 사회가 돌보지 않는 노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온갖 고생 다하면서 자식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온 노인들. 좀비들의 공격으로부터 인길이 특별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모습은 노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 사회의 현실과 닮았다. 경제 효율성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우리는 복지에 신경 쓰지 않고, 노인들은 골방에 갇혀 고독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현실 속의 고독과 공포가 좀비들 사이에 서 있는 인길의 눈빛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우울의 여운이 참 길다.

     

‘부산행’ 속 인물들을 들여다보니, 영화가 현실을 많이 닮았다. 그 덕에 빠르게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주변의 상황들을 깊은 성찰의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살아남기에 집착하는 내가 보였고, 그러면서 내가 잃어버린 가치들이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기차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인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이 좀비들에게 감염되었다. 그만큼 우리에겐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며 나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열차에서 내려 이웃의 손을 잡고 누군가를 위한 노래를 부르기를 권한다. 질주하는 열차에 물건처럼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바라보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시체’가 아닌 정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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