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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04. 2016

아가씨

욕망에 관한 파격적 탐구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는 기존 사회 질서에서 용납하지 않는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전작에서 보여 준 근친상간, 신부와 유부녀의 불륜, 지나치게 폭력적인 사적인 복수 등의 소재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금기 사항들이었다.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박찬욱 감독은 사회 제도의 틀을 벗어나 인간 본성으로서의 욕망을 탐구하는 데 집중해 왔다.

     

이와 같은 경향은 신작 ‘아가씨’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변태적인 성적 취향과 동성애 등의 소재를 중심으로 권력과 돈, 성에 관한 욕망을 탐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리고 있는데, 나는 양면적인 인물의 성격과 그런 성격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플롯의 이중적인 구조에서 쾌감을 느꼈다.

     

주체와 대상을 오가는 인물의 양면성,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서사 구조, 절제 속의 시각적 이미지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청각적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 내가 본 ‘아가씨’는 이처럼 매혹적인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서 감독이 추구하는 다양성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한 성찬이었다. 그리고 그 성찬의 메인 요리는 제도권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시각에서 탐구한 욕망의 실체였다.     


성과 권력

성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원시 사회에서 성은 자유롭게 다양한 행위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시민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성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로 근친상간이나 성도착과 같은 원시적인 욕망의 배출은 금기시되었다. 이를 위해 국가 권력은 교육과 처벌 등을 통해 성을 억압했다. 또한 종교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성과 육체에 집착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억압 아래 성은 행위가 아닌 담론의 형태로 유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은 권력의 특권으로 남용되거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아가씨’ 속의 남성들, 백작(하정우 분)과 코우즈키(조진웅 분)는 권력 지향적이다. 백작은 사창가에서 삐끼를 하며 모은 돈을 레스토랑에서의 우아한 식사에 털어 넣을 정도로 상위 계층의 삶을 동경한다. 코우즈키는 일제 강점기 사회에서 조선인의 혈통까지 지우고 진짜 일본인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 모두 권력에 오염되어 있기에 이들의 성은 권력에 억압된 형태로 나타난다. 백작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을 이용하고, 코우즈키는 성을 이야기로 다룬 외설서를 취급하며 그것에 집착한다. 이들의 성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진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히데코를 유혹할 수 없다. 히데코는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며 진짜 성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대상의 양면성

일반적인 영화보기를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남성은 바라보는 응시자로서 능동적인 주체이고 여성은 바라봄의 대상으로서 수동적인 객체이다. 관객은 남성 인물과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여성 인물을 대상으로 즐기게 된다. 스크린 속의 여성 인물은 극 중 남성 인물의 성적 대상인 동시에 관객의 성적 대상이 된다. 여성 인물은 바라봄의 대상이기 때문에 육체미를 드러내며 남성 인물과 관객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남성 인물은 사건을 일으키고 에로틱한 대상을 자신의 욕망에 맞추어 변형해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여기서 관객은 여성 인물을 훔쳐보는 시각적 쾌락과 남성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서 발생하는 권력의 맛을 오가는 즐거움을 느낀다. 

    

‘아가씨’ 속의 여성들, 숙희(김태리 분)와 히데코(김민희 분)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면서 관능적인 성적 대상이다. 숙희는 히데코의 하인으로서 수동적인 객체이다. 하지만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은 주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다. 히데코는 이모부 코우즈키에게 억압 받으며 길들여지는 대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인물들의 주요한 사건들을 바라보는 존재로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주체이다. 이러한 히데코의 양면성은 외설서를 낭독하는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녀는 외설서의 서사를 주도하는 내레이터이다. 낭독이 끝나고 외설서의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이는 대목에서 그녀는 성적 대상이 된다. 

    

‘아가씨’의 여성 인물들은 이처럼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주체와 대상을 넘나드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난 파격으로서 어떤 이에게는 불편함을 또 다른 이에게는 참신한 맛을 느끼게 한다. 엄격한 사회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숙희와 히데코. 이 둘의 만남은 우리 역사상 가장 경직된 시기였던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사회 속에서 여주인과 하인, 일본인과 조선인의 권력 관계를 무너뜨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이라는 금기를 넘어선 파격이었다. 그 파격의 에너지는 여성 간의 동성애 장면으로 극대화되면서 인간 쾌락의 뿌리에 있는 욕망의 속살을 드러낸다. 관객들은 권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제도권의 금기를 깨뜨리며 자신들의 욕망을 행위로 드러내는 그녀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파격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매혹적인 그녀들의 사랑을 보면서 시각적인 쾌락도 얻게 된다. 관객들은 주체와 대상 사이를 오가면서 동일시와 관음의 쾌락을 동시에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중 구조의 플롯

‘아가씨’의 이야기는 치밀하게 설계된 사기극이다. 사건 간의 필연적인 연관이나 인물 간의 갈등 구조,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따른 서사적 구조이다. 이처럼 인과율을 따르던 구조는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인물들의 관계는 욕망의 꿈틀거림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조정되고, 갈등의 양상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향해 치닫는다. 이처럼 ‘아가씨’는 인과율을 따라 원인과 결과가 명쾌하게 연결되는 폐쇄적 형식과 우연에 의해 결론을 예측할 수 없는 개방적 형식이 중첩된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중 구조의 플롯을 통해 제도와 틀 안에서 계획적으로 통제될 것 같은 인생이 실은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현실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기극을 기획한 인물들은 각기 치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사랑’이라는 우연적 요소를 계산에 넣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 세상에 치밀함이란 없다. 우연적 요소로 인해 결과가 모호해지고 만다. 박찬욱 감독은 ‘현실의 모호성’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한 가지 시각만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부각함으로써 획일화되어 있는 기존의 가치나 사회 질서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해체하고,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인간의 욕망은 다양하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세상은 하나의 가치로 통제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아가씨’가 인물의 양면성과 플롯의 이중적 구조를 통해 다양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배우 김민희의 공이 무척 커 보였다. 순진함과 당돌함, 연약함과 과감함 등의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낸 그녀는 꿈틀대는 욕망의 소용돌이 같았다. 그리고 눈빛 하나로 상대방을 사로잡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와의 우연한 사랑에 개연성을 부여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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