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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May 20. 2016

엽기적인 그녀

누가 그녀를 엽기적으로 만드는가?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을 보셨나요? 그림의 가운데에는 삭막한 겨울 날씨에 주변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목 하나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 양쪽으로는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과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행상을 나서는 듯한 여인이 보입니다. 남자들은 어디에 있느냐고요?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어두운 시대 상황(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시대)을 고려해 볼 때, 겨울나무 한 그루가 바로 가장으로서의 남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들었던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돌보아야 했던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의 모습이 잎사귀를 다 떨구고 헐벗은 몸뚱이만으로 서 있는 나목 한 그루의 모습으로 화석화된 것이지요.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이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제대로 된 남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더군요. 구토물 세례를 받은 가발 쓴 노인네, 원조 교제하는 중년 사내들, 변심한 애인 때문에 탈영한 군인 등등, 영화 속의 남성들은 기존의 가치와는 동떨어져 왜소화된 모습입니다. 이처럼 지나치게 희화화되거나 나약하기 그지없는 남성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그녀'를 더욱 엽기적인 존재로 부각하였습니다. 

'그녀'를 엽기적이게 만들어 버린, 더 중요한 이유는 극의 후반부에서 드러납니다. '그녀'가 사랑하던 '그'가 죽은 것이죠. '그녀'의 버팀목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탈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견우를 만나게 됩니다. 견우 역시 앞서 말한 왜소화된 사내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죠. 그래서 '그녀'에게 꽤 시달립니다. 그런 나약한 견우의 성격으로는 '그녀'의 버팀목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견우에겐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랑이 있었던 거죠. 결국, 견우는 그러한 정성으로 '그녀'의 든든한 '그'가 됩니다. 

견우와 '그녀'가 타임캡슐을 묻은 곳 기억하시죠? 거기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아마도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인 '그'를 상징하는 것 같네요. 견우는 벼락 맞아 불타 버린 그 나무를 새로운 것으로 바꿔 심습니다. '그녀'를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녀'의 사라진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그' 가 되면서 이야기는 아주 행복하게 끝이 납니다. 


“작년 여기 있던 나무는 벼락을 맞았어.
두 쪽이 나서 죽었지.
근데 그걸 가슴아파하던 젊은이가 있었어.
올 봄에 어디서 찾았는지,
전에 있던 나무하고 똑같이 생긴 이 나무를 옮겨와서 심었지.
젊은이가 나무를 심고 있을 때, 나한테 물었지.
옛날 그 나무하고 똑같이 보이냐고.
나무가 죽은걸 알면 가슴 아파할 사람이 있다면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해야 한다고 했어.”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IMF 시기를 거치면서 움츠러든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가장들의 모습이 매사에 나약하고 소심한 남성상으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흔들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녀'의 엽기적 행각으로 형상화되고 있고요. 영화 속에서는 그 불안정한 관계가, 결국 희생과 사랑으로 극복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그처럼 행복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그런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 영화 내내 이어지던 '그녀'의 엽기적 행동들도 조금은 어색하고 서글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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