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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Apr 19. 2016

설행_ 눈길을 걷다

외롭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 '수선화에게'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외롭다. 눈보라가 치는 길 위를 혼자 걷는 것처럼. 눈길은 길을 걷는 자에게 두 가지 다른 느낌을 준다. 앞을 보면 순백의 깨끗한 세상이 있다. 아름다워서 걷고 싶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발자국들로 어지럽다. 검은 얼룩들이 지저분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그러하다. 분명 내 앞에는 밝은 희망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지난날들을 내가 다 망쳐놓은 것 같은 죄책감 때문에 어두운 우울 속으로 빠져 들고 만다. 끔찍하고 괴롭다. 그래서 그 순간을 잊기 위해 무언가에 집착하게 된다. 술, 도박, 게임, 쇼핑 등에 빠져 있는 동안은 현실의 문제를 잊게 된다. 그 유혹에 익숙해지게 되면 중독자가 되고, 온전한 나는 사라지고 만다.

    

눈길을 걷는 남자, 정우

김희정 감독의 ‘설행’ 속 정우(김태훈 분)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도원 테레사의 집으로 들어간다. 어머니에게 이끌려 테레사의 집으로 가는 정우는 어머니에게 무척 미안해하면서도 어머니와 헤어지자마자 소주를 들이켠다.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는 별개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술을 찾게 되는 알코올 중독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길 위를 걸어가던 아이의 눈빛을 하고, 짐승의 호흡처럼 거친 몸짓으로 술병을 집어 드는 김태훈의 연기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인 알코올 중독자 정우의 처지를 잘 그려냈다.  

   

기적을 기도하는 여자, 마리아

줄담배를 피우고, 미친 듯이 술을 찾아 헤매는 정우의 모습. 그의 중독을 치료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그의 앞에 마리아(박소담 분)가 나타난다. 그녀는 정우가 묵는 방에 걸린 그림에 대하여 설명한다.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예요. 아무리 덧칠을 해도 계속 다시 나타나는 상처가 있는 성화(聖畵)죠. 기적을 일으키는 성화로 불린답니다.” 검은 성모의 상처는 아무리 술을 끊으려고 해도 다시 마시게 되는 정우의 병증(病症)과 오버랩되면서 기적에 대한 바람을 더 크게 한다. 정우에게 아무 이유 없이 잘해주는 마리아의 존재는 정우의 외로움을 살포시 보듬어 주고 있다. 오래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처럼.     


‘점’과 ‘점’으로 연결되다

마리아는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무녀(巫女)인 어머니처럼 되는 것이 무서워서 신병(神病)을 앓다가 수녀가 되기 위해 어머니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자신에게 옮겨 붙는 것이 두렵다. 자신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신을 채우는 현상. 알코올 중독인 정우의 상황과 비슷하다. 마리아가 믿는 영혼은 점이다. 우리의 영혼은 점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성모님이 연결해 준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독립된 개체로서 관계를 맺고 본질적인 외로움으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 마리아는 그렇게 정우와 연결되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검은 성모의 기적

시련의 바다에 둘러싸인 채 고독한 섬이었던 정우는 마리아의 영혼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치유의 기적을 꿈꾼다. 순간순간 술의 유혹을 견디면서 회복을 기원한다. 마리아의 기도와 정우의 기원이 합쳐지면서 정우는 인생이라는 눈길 위를 엄마 손을 잡은 아이처럼 한 걸음씩 내디뎌 간다. 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해치기만 하던 정우는 위협으로부터 마리아를 지키려 한다. “중독이 뭔지 알아? 속도가 붙으면 멈추지 못해. 주변을 파괴하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파괴자일 뿐이라고.”라고 외치면서 중독과의 싸움에 홀로 당당히 맞서려 한다. 운명처럼 무거운 중독의 공포 앞에서 나약하게 이리저리 피하거나 다시 술에 의존하던 모습과는 달라졌다. 정우에게도 검은 성모의 기적이 일어나는 듯하다.  

   

고통스러운 장면이 많지만, 견디고 나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망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방황하는 영혼의 고독감을 섬세하게 표현한 김태훈. 서울에는 눈이 내리는지 궁금한 소녀의 호기심을 담은 얼굴로, 빙의(憑依)된 무녀의 섬뜩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박소담. 두 배우의 연기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을 일상의 세계 속에 뿌리내리게 하여 감독의 메시지를 관객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로 치열했던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전쟁터 같은 세상. 그곳에 모성과 신의 자취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현실 속의 우리들은 외롭고 불안하다. 그런 우리에게 이 영화는 말한다. 우리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지만, 그 영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영혼과 영혼 간의 관계 속에서 위안을 얻으며 외로움을 견뎌 내라고. 오늘 견디고 나면 내일 다시 아픔이 되살아나겠지만 그때 또다시 견디라고. 나의 마리아는 어디에 있는지, 오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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