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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Sep 17. 2016

터널

욕망에 매몰된 시대의 동화

터널 속을 달리는 자동차는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먼 거리로 돌아가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산 밑동을 터트리고 파헤쳐서 새로 낸 길. 그 터널 속을 질주하는 자동차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양심이든 이웃이든 모두 버리고 오직 앞만 보며 달리는 우리들을 닮았다. 김성훈 감독의 ‘터널’에서는 탐욕스러운 욕망을 상징하는 인공물 ‘터널’이 무너지고, 그 속에 개인이 매몰되는 상황을 상정한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닥뜨린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 터널 안팎에서 관찰한다.

    

관찰 대상 1. 정수(하정우 분)

정수는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이다. 흥정을 업으로 삼고 있는 만큼 임기응변에 강하고 융통성이 있다. 자신의 주문과 다르게 기름을 넣은 노인의 실수를 대범하게 넘기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몫을 생각하며 갈등하기도 한다. 인간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정수는 생동감이 있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변화무쌍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소시민들처럼.

정수는 큰 계약 건을 앞두고 들뜬 기분으로 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무너져 내린 터널 안에 홀로 갇히고 만다. 사막에 던져 놔도 살아남는다는 영업 사원이지만, 그의 임기응변도 터널 잔해 속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탈출구가 없는 정수의 상황은,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오늘날을 살아가는 개인의 현실을 재난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터널 속에 고립된 정수의 상황을 그리는데 지루하지가 않다. 이는 입체적인 정수의 캐릭터 덕이다. 먹을 것에 분노하고, 나누는 일에 망설이면서 차지게 욕하는 정수. 정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던지고, 과감한 결단과 행동으로 국면을 전환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여리면서도 카리스마가 있고,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성격을 동시에 표출해 내는 하정우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하정우의 연기가 자연스러운 만큼 관객들은 울고 웃으며 정수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한다. 그러면서 정수가 겪은 재난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확장된다.     


관찰 대상 2. 미나(남지현 분)

사회 초년생인 미나는 터널 붕괴 사건의 숨겨진 희생자다. 그녀는 운전석에 박혀 옴짝달싹 못 한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신입사원 연수를 걱정한다. 이런 미나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들이 고통받는 이유도 제대로 모른 채 오직 취업에 목숨을 건 청년들. 그들은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고시원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의 고통과 빈곤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순간에서야 뒤늦게 발견된다. 기득권 세력의 화려한 사회 이면에 숨겨진 희생자다.

미나는 자기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애완견 ‘탱이’를 챙긴다. 이런 미나의 태도가 정수를 위험에 빠뜨리는 철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탱이처럼 돌봄을 받고 싶고, 또 받아야 하는 미나의 참담한 상황을 대조적으로 부각하는 행동으로 읽힌다. 탱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통해 청년 미나를 지켜 주지 못한 미안함과 처연함이 극대화된다.     


관찰 대상 3. 세현(배두나 분)

세현은 정수의 아내다. 터널 안에 매몰되어 있는 남편의 구조를 바라는 세현의 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 존중되고 지켜져야 정상적인 사회인데, 영화 속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세현의 바람은 구조 작업 때문에 금전적 손실을 입는 세력들에 의해 이기적인 욕심으로 전락해 간다. 세현은 허술한 구조 시스템에 남편을 빼앗긴 피해자다. 그런 피해자가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이 사회의 가치 기준이 오로지 ‘경제 효과’에 있음을 드러낸다.

세현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지막 메시지를 남편에게 보내는 장면에서는 인륜과 도덕을 지킬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슬픔을 커다란 눈동자에 담고 있으면서 남편을 구하기 위한 강인함까지 온몸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배우 배두나. 상황이 만들어 내는 인물의 다양한 성격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는 그녀의 연기가 터널 밖의 절박함을 잘 드러내면서 터널 안팎의 정서적 균형을 맞추고 있다.     


관찰 대상 4. 대경(오달수 분)

사고 대책반의 구조 대장 대경은 꽉 막혀 버린 터널에 진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지만 구조는 더디게만 진행된다. 대경을 통해 관객들은 터널의 도면이 잘못되었고, 터널은 부실시공되었으며, 구조 시스템은 체계적이지 못함을 알게 된다. 경제 효과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단기간에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에 인간을 배려한 장치들은 없었던 것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터널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고, 그 터널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도면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실. 터널 안을 지나다닐 사람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경의 역할은 묵묵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륜과 도덕이 무너져 버린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대경이 보여 준 책임과 배려이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정수에 대한 구조의 책임을 끝까지 져 버리지 않는 대경. 우리의 주변에는 가라앉는 배를 버리고 제일 먼저 탈출하는 선장도 있지만, 자비로 구입한 최소한의 장비를 갖추고 제일 먼저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소방관들도 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끝까지 구조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대경은 보여 주었다. 영화 속에서 정수를 구한 건 드론과 같은 최신의 장비가 아니라 우직한 대경의 책임감이었다.

대경은 정수의 처지를 공감하기 위해 자신의 소변까지 마신다. 이런 그의 배려심에서 따뜻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한 주변 환경들이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최소한의 배려 덕일 것이다. 모든 것이 숫자로 치환되는 현실의 논리에 맞서 터널 안에 묻힌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경.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존중하는 데서부터 대경의 배려는 시작된다. 진심으로 정수를 도와주고 보살펴 주려는 마음을 가진 대경이었기에 끝까지 그는 정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강인한 의지가 바로 어떤 동아줄보다 튼튼한 생명줄이 된 것이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포근하고 의리 있어 보이는 배우 오달수의 이미지는 대경의 성격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영화가 개봉한 뒤에 사람들은 이 영화가 ‘세월호 참사’와 판박이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는 최근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사건이기에 어떤 텍스트를 비교하더라도 비슷하게 읽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세월호 참사와 닮아 있지만, 세월호 참사와 비교하자면 훨씬 아름다운 동화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매몰자도 구조했으며, 쓰레기 같은 정치인들에게 시원한 욕지거리도 쏟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우리 곁에는 아이들을 바닷속에 둔 채 무너진 터널 속에 파묻힌 아픔으로 옴짝달싹 못 하는 이웃들이 있다. 이들을 구조하는 이 시대의 동화를 우리는 한 줄이라도 더 써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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